[김병익칼럼]노후의 두 모습

  • 입력 2004년 2월 4일 19시 09분


코멘트
전현직의 많은 국회의원들이 구속 수감되는 가운데 대학 교수를 비롯한 숱한 전문 지식인들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려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보면서 나는 C형의 술회를 되씹어본다.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인촌기념사업회 일을 보던 그는 김성수 선생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인촌 선생과 생전에 교분이 있던 정치인 기업인 학자 예술가 등 여러 인사들을 인터뷰하여 녹음했다. 면담의 마지막에 그는 으레 “지난 평생을 어떻게 돌아보십니까”란 질문을 던졌는데, 특히 정치인과 학자 두 부류의 반응이 상반됐다는 것이다.

▼老학자의 평온 "다시 태어나도…" ▼

현역에서 물러나 한미(寒微)한 신세가 된 정치인들은 대개 분노하거나 후회하는 고백을 늘어놓는다고 했다. 그때 아무개가 나를 배신했다, 그 사람이 뒤에서 딴전을 부렸다 등등 배반과 음모, 거짓과 모략으로 뒤얽힌 어두운 권력 놀음에서 좌절과 실패의 순간들을 원한과 비분으로 돌이켜보더라는 것이다. 요즘의 정치판을 보더라도 충분히 상상될 장면이다.

그 반면 학자들은 어떤 스승이 무슨 가르침을 주었고 자신의 후배와 제자들이 어떤 학문적인 뒷바라지를 해주었으며 자기 업적을 어떻게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가 하는 감사와 흐뭇함으로 밝고 즐거웠으며 다시 태어나도 자기는 학자의 길을 걷겠다고 후회 없는 생애에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학자는 아무개 제자가 가져온 게 있으니 한잔 하자고 술을 내오며, 안주는 누가 보내온 것이라고 고마워했다. 비록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책으로 사방 벽을 둘러싼 서재에서 대화를 나누는 그 분위기는 따뜻한 윤기가 감싸고 있었으며 한 인간이 생애에 누릴 수 있는 평온과 자족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느끼게 했다. 그것은 집안으로 들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한참 된 듯 썰렁하게 한기가 돌고 고적하게 보이는 전직 정치인의 거실 풍경과는 대조적이었다.

C형은 여기서 정치인과 학자의 전혀 대조적인 노후의 두 모습을 통해 두 가지 삶의 형태를 관찰했다. C형은 이후 정계로 입신하려던 뜻을 깨끗이 버렸고 실제로 정권이 바뀔 때 강하게 들어오던 출마 권유를 그는 거절했다.

인촌 선생과 관계를 맺은 후배라면 한 세대 전의 정치인들이었을 터인데 그 후의 갖가지 변화와 개혁을 치른 이제에도 정치계의 내막과 정치인들의 이면은 오히려 더 복잡하고 지저분해진 것 같다. 참신하고 양심적인 신진들도 정계에 들어가면 어느 사이 부패 정치인으로 전락하고 정평 있는 ‘대쪽’ 후보나 도덕성을 강조하여 젊은 표를 모은 대통령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니 우리나라의 정치란 ‘마의 블랙홀’이 아닌가 하는 비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학계라고 해서 반드시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겠지만 정치권이란 예나 이제나, 수구적이거나 개혁적이거나 간에 가림 없이 그 어지러움이 더해지는, 구조적으로 타락한 자리임이 분명해 뵌다. 라인홀트 니부어 식으로 말하자면 ‘부도덕한 사회에서의 도덕적 인간’의 무기력을 확인시키는 장면을 우리 정치는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정치에 혐오감을 갖는 것도 아니고 전문 지식인들의 정치참여를 굳이 말리는 것도 아니다. 정치가 원래 ‘악의 함정’은 아닐 것이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진사회는 깨끗하고 신뢰 어린 정치문화의 아름다운 광경들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인 말년은 왜 항상 쓸쓸한가 ▼

그렇게 할 수 있게끔 해주는 구조와 제도 관행의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정치도, 정치인도, 그래서 민주주의도 선진화도 불가능하다. 정치적 보복이나 표적수사, 편파사정의 차원을 넘어 참된 정치, 밝은 정치문화, 상생의 정치역학을 이룰 정치개혁은 그래서 더욱 절실해진다. 적어도 인간적으로, 정치인의 참담한 노후를 나는 더 이상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인하대 초빙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