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9년 함석헌 사망

  • 입력 2004년 2월 3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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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 씨앗 하나가 소와 말의 내장을 통과하고 똥 속에서도 죽지 않고 있다가 싹을 틔워, 온 들을 푸르름으로 가꾼다.”

함석헌. 그는 ‘광야의 예언자’였다.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정권, 군사정부 아래서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었다. 얼음장을 깨는 힘찬 울림이었다. 그는 매양 하얀 수염, 하얀 두루마기, 하얀 고무신의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다. 그는 재야(在野)의 중심이었다.

붓을 들면 풍랑(風浪)을 가르는 서슬 퍼런 글이 튀어나오고 연단에 서면 천지를 뒤흔드는 사자후를 토했다.

신념은 꽃처럼 붉었고 순정은 숫총각 같았던 그. 시인 고은의 말대로 ‘당신은 걱정하는 사람의 운명으로 이 세상에 온’ 선지자였다.

함석헌은 한국 근현대사의 고난을 짊어졌다. 그는 신(神)의 도시와 세속도시 사이에서 여든아홉 해의 격랑을 탔다.

그는 아홉 살 나이에 한일병합을 맞았다. ‘자라나던 어린 순에 서리가 내렸다.’

1919년 평양고보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가담했다 퇴학을 당했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 ‘성서조선’ 사건 등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른다. 감옥살이는 그에게 ‘인생 대학’이었다.

함석헌은 그 엄혹했던 1970년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씨알이란 무엇인가. 하늘의 기운과 뜻이 씨알 하나에 맺혀 있다. 씨알 하나가 하늘과 닿아 있다. 그것은 사람 속에 깃들인 하느님의 씨앗이다. …씨알 하나, 한 생명은 그토록 소중하다.”

가파른 역사의 굴곡을 십자가처럼 떠메고 다닌 그의 삶과 사상은 아직도 미지의 광맥(鑛脈)으로 남아 있다. 유불선과 기독교 사상을 일치시킨 사유(思惟)는 한국 사상사에서 원효와 율곡의 맥을 잇고 있다.

“새는 나뭇가지 위에서 지구의 중력(重力)과 싸움이 있기에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매 순간 죽음과 싸움으로써 삶이 있다. 삶 자체가 솟구쳐 오르는 생명의 본래 모습을 지키려는 끊임없는 싸움이다. …희망은 절망하는 사람만이 갖는다.”

그 카랑카랑한 ‘씨알의 소리’가 그립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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