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468년 구텐베르크 사망

  • 입력 2004년 2월 2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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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양의 근대(近代)를 ‘찍어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은 인류사의 ‘빅뱅’이었다.

구전(口傳) 커뮤니케이션 시대를 살았던 인류는 ‘활자(活字)인간’으로 거듭 태어났다.

마셜 맥루한은 우리가 지금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에서 살고 있다고 썼다. 금속활자는 지식정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했던 것이다.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해체하고 소통의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의 인쇄술은 근대의 이성과 합리성이 요구하는 ‘지적(知的) 게놈’이었다.

서구의 근대문명은 인쇄술이 낳은 시각문명이었다. 근대성의 심리 구조와 가치 체계는 활자의 소산이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 앞선다고?

인류의 역사에서 인쇄술이란 ‘오랜 여행’의 산물이다. 서로 다른 많은 문화와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여행에 동행했다. 딱히 누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금속활자의 주조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과학의 발달을 통해 금속활자가 발명되고 그 금속활자가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는 ‘근대성의 상호작용’이야말로 금속활자의 문화사적 본질이 아닐까.

위대한 발명은 위대한 시대에 꽃을 피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종교개혁에 불을 댕겼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서로 돌아가자’는 단 한마디로 압축된다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없이 그게 가능했겠는가.

그러나 그는 구질서의 신봉자였다. 종교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다. 유난히 돈 욕심이 많았던 그가 인쇄술을 이용해 맨 먼저 찍어낸 것은 악명 높은 ‘면죄부’였다.

그는 신기술로 무장한 벤처사업가였다. 그는 생애 최고의 야심작인 ‘성서’ 출판을 통해 거대 단일 시장인 유럽을 석권하고자 했다. ‘표준성서’의 대량생산을 통해 그는 중세의 ‘빌 게이츠’를 꿈꾸었다. 그런 그가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으니.

인쇄술은 신교도들의 말 따라 ‘신(神)의 은총’이었고, 구교도들의 말 따라 ‘악마의 저주’였다.

오묘한 신의 역사(役事)였다. 선악을 가리지 않는 역사의 쓰임이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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