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그 섬에 내가 있었네'

  • 입력 2004년 1월 30일 17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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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중산간 마을에 자신의 전 생애를 사진과 맞바꾼 한 사내가 산다. 제주의 자연은 사진작가 김영갑씨의 필름에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제공 Human&Books
제주도 중산간 마을에 자신의 전 생애를 사진과 맞바꾼 한 사내가 산다. 제주의 자연은 사진작가 김영갑씨의 필름에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제공 Human&Books
◇그 섬에 내가 있었네/김영갑 사진·글/256쪽 1만1000원 Human&Books

사진작가 김영갑씨(47)가 바람을 안고 제주의 초원을 떠돌며 기록을 남겼다.

사는 이야기와 내밀한 속내는 글로 털어 놓았고, 마음을 사로잡은 풍경은 사진에 고스란히 담았다. 작가가 주제로 삼아 온 ‘외로움과 평화’가 잘 표현된 파노라마 사진 70여컷이 책에 수록됐다.

1980년대 초 김씨는 서울에 적을 두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82년부터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다 제주도에 매혹돼 85년 아예 이 섬에 정착했다. 이후 20년 동안 한라산과 마라도, 바닷가와 중산간 등 작가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뭍에서 온 이 독신남성은 처음엔 방 한 칸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섬사람들이 육지말을 하는 사내를 경계했던 것. ‘빨갱이’라는 동네사람들 신고로 경찰서에도 여러 차례 끌려갔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놓아준 다리를 밟고, 외로운 노인들에게 말벗이 돼주며 마을버스 운전사와 우정을 맺기도 했다.

선이 부드럽고 풍만한 제주의 오름은 늘 작가를 유혹했다. 신선한 공기, 황홀한 여명, 새들의 지저귐, 풀냄새, 꽃향기, 실바람…. 그는 제주의 평화와 고요를 필름에 담고 또 담았다.

밥 먹을 돈을 아끼고 막노동을 해서 필름을 샀다.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과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그런 그가 5년째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을 앓고 있다.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불치의 퇴행성 질환으로 그새 체중이 75kg에서 43kg으로 줄고 말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호흡곤란으로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아름다운 꽃이 열흘을 가지 못하는 허무한 세상살이를 잊기 위해 미친 듯이 하나에만 몰입했다. 살고 싶다는 나의 기도는 사진작업이었다.’

그나마 그동안 찍어둔 20여만장의 사진으로 2002년 폐교를 꾸며 사진갤러리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연 이후, 이제는 셔터를 누를 손끝의 기운마저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호흡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건강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밤늦도록 사진작업에 매달렸을 테지만 이젠 한가로운 일상에 익숙해졌다. 루게릭병이 내게 준 선물이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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