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조선시대 도자기'

  • 입력 2003년 11월 21일 17시 32분


코멘트
◇조선시대 도자기/김영원 지음/482쪽 2만9000원 서울대출판부

1445년 순찰사 김종서(金宗瑞·1390∼1453)가 경상도 고령에 들러 당시 현감이었던 김숙자(金叔滋·1389∼1456)와 대면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상 위에 놓인 백사기(白砂器)를 가리키며 ‘귀현(貴縣)의 사기는 매우 아름답다’고 말한다. 김종서가 찬탄한 백사기는 당시 광주 백자보다 더 정치(精緻)하다고 평가됐던 고령 백자였다.

‘세종실록지리지’(1432년 완성)에 나오는 전국 139개의 자기소(瓷器所) 가운데 진상용 백자를 생산하던 곳은 경기도 광주목, 경상도 상주목, 고령현 등지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고령은 광주보다 우수한 백자를 생산해 내고 있었다. 그런데 대제학을 지낸 성현(成俔·1439∼1504)은 고령 백자가 아름다우나 광주 백자가 더 정절(精節)하다고 하여 광주 백자를 으뜸으로 꼽았다. 반세기가 지난 후의 평가이긴 하지만 왜 성현은 광주 백자를 더 높이 평가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1467년 광주에 사옹원(司饔院)에서 관리하는 분원(分院)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왕실과 조공무역 등에 소용될 공납자기의 제작을 감독하는 관청인 사옹원이 그 소임을 충실히 하고자 광주에 도자기 제작소, 즉 관요(官窯)를 설치했던 것이다.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분원 관요 체제가 이루어지면서 그릇의 품질이 달라진 것이었다.

조선 백자는 이렇듯 제도의 산물이기도 하다. 저자(국립제주박물관장)가 이 책에서 ‘요업체계’(제2부)의 서술에 많은 할애를 하고 있는 것도 완상의 대상이기에 앞서 도자기가 갖고 있는 법제사적이고 산업적인 측면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원을 전후한 시기에 대한 요업체계의 분석만으로도 당시의 사회, 경제, 정치 등과 관련된 구조 속에서 그려지는 조선시대 도자사의 전체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업의 체제 변화 속에서 ‘도자양식’(제3부)의 변천을 다룬 저자는 개개 유물에 대한 섬세한 해설을 놓치지 않는다. ‘주요 도요지’(제4부)에서 독자는 현장에서 전달하는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책의 일관된 미덕이기도 하지만 ‘연구사와 시기 구분’(제1부)에서 저자는 일방적으로 논지를 전개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연구사를 예시하며 독자에게 설명, 설득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여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김승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leftantique@hanmai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