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김영승, '반성 100'

  • 입력 2003년 9월 23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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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 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시집 '반성'(민음사)중에서

이 ‘명랑한’ 시를 읽을 때마다 마음 구들장 환하게 달아오르지만, 왜 이리 가슴 한쪽이 아린지 모르겠다. 어느 구절에도 값싼 감상(感傷) 하나 없으나 콧날이 시큰해지는 건 ‘말 속에 숨은 말’ 때문이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에서 쿵하고 ‘니들은 두 장씩 날러’에서 또 쿵한다.

‘껌정칠’ 대신 따뜻한 아랫목에서 군것질 투정이나 할 소녀들이 아닌가? ‘추운데 니들은 들어가’를 삼키고 고맙고 미쁜 마음에 우러나오는 ‘두 장씩 날러’가 아닌가?

저 연탄장수 부녀는 달동네 높은 길을 걸어 올라온 게 아니라 연탄 리어카째 눈송이를 타고 사르락 지상에 내려왔다가 사뿐히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

9월 23일부터 한로(寒露) 전까지 보름간은 추분이다.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이 시기는 ‘땅 위의 물이 마르며 벌레가 흙으로 창을 막는 때’이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하여 집집마다 아궁이를 돌보는 때에 모든 난방 중에 마음 훈훈한 난방이 제일이라 여겨 이 시를 소개한다.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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