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윤석/개방시대를 살아가는 길

  • 입력 2003년 9월 21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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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전에는 왜 이리 많은 돈이 풀려 있나 싶더니 이젠 그 반대 풍경이다. 부풀어 오른 소비 습관과 욕망을 잠재우기 쉽지 않은 듯 욕구 불만의 표정들이 거리를 덮고 있다. 보급률 세계 상위권 나라답게 저마다 휴대전화기를 꺼내들고 푸념해 보지만 형편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과거와 같은 고성장을 한국에서 기대할 수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투자는 줄고 노동생산성도 외환위기 이전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이유에서다.

세계무역기구(WTO), 자유무역협정(FTA), 일본 문화 개방…. 범지구적 개방 공세에 한국은 박탈감을 동반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세계화를 표방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개방에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살림 자금의 상당 부분을 외부 자금에 의존했지만 여러 변화 과정을 통해 형성한 지금의 부를 고수하려는 욕구가 변화를 거부하는 몸짓으로 나타나고 있다. 피해의식에 기반을 둔 방어본능이라면 슬픈 역설이다. 한국에서 휴대전화를 거부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욕구는 분출하는데 이를 충족할 수단이 동나 간다는 점에서 전환기는 아픈 과정이다. 결사반대를 외쳐 봐도 메아리는 작고 변화 방안은 떠오르지 않는다. 성취의 자취는 아련하고 허탈감이 엄습한다.

그런 가운데 투쟁의 타성은 완고하다. 절대 독재의 전횡 앞에서 소수의 인원이 목숨과 지위를 걸고 감행했던 시위 투쟁의 역사가 결국 사회의 개방화를 이끌어 냈다. 자아의식과 권리의식의 확산과 더불어 이제 시위 투쟁은 제몫 찾기를 요구하는 국민적 의사표현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 사이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전통을 대변하는 독일의 집권 사민당은 "분배 위주 정책은 더 이상 없다"며 우리와는 반대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외부와 차단된 삶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터넷 강국 한국이 인정하지 않는 것을 세계는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나라의 존재나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끼리' 똬리를 트는 습성은 더 이상 국가의 장기적인 전략이 될 수 없다. 마치 본산지 중국에서조차 존재가 희미해진 '마오쩌뚱(毛澤東) 주의'를 기치로 내전을 벌이고 있는 네팔의 반군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로 국제사회에 비칠 가능성마저 있다.

피해감과 열등감, 일방적인 손익계산으로 점철된 주변부 의식만으로는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설득력을 얻기 힘들 것이다. 그것은 마치 미국 브랜드의 신발, 배낭, 의상으로 무장하고 반미를 외치는 자가당착과도 같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확산 초기에 중국공산당은 관례대로 "감염자 수는 국가 기밀"이라며 정보 공개를 거부했지만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완전 공개로 선회, 대 파국을 모면하는 동시에 달라진 후진타오(胡錦濤) 신 지도부의 체면을 그나마 살려냈다.

외세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시작한 굴절된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속히 축적돼온 소비와 투쟁의 추억이 서서히 사라져 간다. 우리 사회가 늘어나는 소비를 감당할 생산력을 가졌는지, 투쟁과도 같은 삶을 꾸려온 개인과 집단의 도덕적 투명성의 힘은 어느 정도인지 하는 의문이 그 위로 겹쳐진다.

지금 겪는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지금의 갈등이 앞 세대보다 더한 것인지, 후세에는 과연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는지를 찬찬히 성찰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전란과 절대 빈곤, 절대 부자유→평화와 자유, 부(富·혹은 '상대적 빈곤')의 시대를 넘어 자율과 책임, 주인의식, 진취적 전망의 앞날을 구상하는 일이 비경제적인 일일까. 새로운 풍요의 모델을 향해 고행(苦行)을 마다않는 자세가 지금 세대의 몫이 아닌가 싶다.

박윤석 국제부 차장 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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