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衆論만 있고 公論은 없다

  • 입력 2003년 6월 29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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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손꼽히면서도 나치에 대한 부역혐의를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1886∼1954)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범재판정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여러분은 잊고 있지만 나치의 집권은 선거를 통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론(public opinion)’이 아니라 ‘중론(mass opinion)’의 결과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에 대한 ‘반동’으로 독일 국민이 나치를 택했지만, 그것은 ‘합리적인 공공(公共)의 의견’이 아니라 ‘대중(大衆)의 감성적 선택’이었다는 반성의 토로였다.

‘광복 이후 최대의 국론분열’이란 지적을 받고 있는 2003년 우리의 정치 사회상은 글자 그대로 이해집단간의 ‘중론’의 충돌만 있고, ‘공론’의 합의는 실종된 상황이다. 모두 ‘내편’아니면 ‘네편’으로 갈려 있기 때문이다.

핵 위기의 해법과 남북문제에 대한 여야, 진보-보수세력간의 견해차는 다시 거론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철도 노조의 파업처럼 집단의 이익을 앞세운 ‘제 몫 챙기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데도 정치의 이해 갈등조정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다 각종 경제지표에 적신호가 켜지고, 광복 후 처음 ‘다음 세대가 앞 세대 보다 못사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는 경고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도 공론과 중지를 모으려는 노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한 원로 경제학자는 최근 “정부에서 무슨 모임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와도 이제는 가기가 싫다. 보수적인 의견을 내놓으면 ‘꼴 보수’라는 비난을 받을 것 같고, 무슨 지적을 해도 ‘뭘 잘못 알고 있다’는 대응만 돌아온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렇다 보니 ‘옛날 같으면 쿠데타가 몇 번 일어날 상황’이란 여당 중진의원의 말이나 ‘4·19 직후 같은 혼란상’이란 원로 종교인의 말이 만만치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최근 상황이다. 실제 필자 자신도 한 달여 전쯤 택시운전사와 한 전문직종사자가 동시에 비슷한 얘기를 서슴없이 하는 것을 듣고 섬뜩함을 느낀 일이 있었다.

문제는 이 같은 ‘한국 주식회사’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집단의 이해가 아니라 공론을 수렴해 해결의 대안을 내세울 세력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내 의석의 반(136석)을 넘는 153석을 가진 ‘공룡야당’이면서도 아직 정쟁에 몰두하는 인상만을 국민에게 안겨온 한나라당에 다시 눈길이 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6일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의 새 대표로 선출된 최병렬(崔秉烈) 대표는 경선기간 중 ‘보수세력의 통렬한 자기반성’을, 대표 선출 직후에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국민 앞에 다짐했다.

그러나 대선기간을 ‘반(反) DJ’ 정서에 호소하는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지새웠던 한나라당의 새 체제에 대해 아직은 “결국 원내의석의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여권을 압박하는 구태를 반복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최 대표의 당선에 ‘민정계’와 ‘영남’이란 특정 이해집단의 세결집이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이해집단의 ‘중론’이 반영된 결과라는 비판론도 적지 않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한나라당이 스스로의 다짐처럼 환골탈태(換骨奪胎)해 공론수렴의 기능을 되찾을 때 그토록 원하는 ‘정권탈환’의 길도 열리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특정집단의 이해를 반영하는 ‘중론’의 대변자 역할을 벗어나 오늘의 총체적 위기에 대안을 제시하는 한나라당 발(發) ‘국가회생 프로그램’을 빠른 시간 내에 내놓기를 기대한다.

이동관 정치부 차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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