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상영/레이더스

  • 입력 2003년 4월 13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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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출간된 소설 ‘바이코리아’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삼성전자의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군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골드만삭스 등을 동원해 삼성전자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나선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으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동기는 다르더라도 현실세계에서 M&A는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살 만한 기업을 물색해 M&A한 뒤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회생시켜 비싸게 되파는 개인이나 기관투자가를 ‘레이더스(Raiders)’라고 부른다. 보통 ‘기업사냥꾼’이라고 번역하지만 나쁘게 표현해 ‘기업약탈자’라고도 한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을 이끌면서 위대한 경영자로 추앙받았던 잭 웰치도 기업사냥꾼이었다. 그는 GE의 기업가치를 극대화하기 16년 동안 480여개 기업을 사고팔았다. 세계 최고의 가치투자자로 꼽히는 워런 버핏도 기업사냥꾼이다. 그는 대규모 M&A펀드를 운용하면서 기업가치에 비해 값이 싼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인 뒤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 이런 유형의 투자자들은 때로 적대적 M&A를 하겠다고 협박해 주식을 원래 대주주에게 비싼 값에 되팔기도 하는데 이를 그린메일(Greenmail)이라고 한다. TWA항공의 칼 아이칸 회장은 유명한 기업사냥꾼이다.

▷한국은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외국인에 의한 M&A를 전면 허용했다. 당시에는 외자 유치가 국가적 과제여서 빗장을 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삼성차 대우차 등 적지 않은 국내기업이 외국기업에 인수됐다. 하지만 외국인 기업사냥꾼이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대량 매집해 경영권을 빼앗은 적대적 M&A 사례는 아직 없다. 적대적 M&A는 대상이 된 기업이 경영권 방어에 나서기 때문에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하면 기업사냥꾼 입장에서도 거액의 자금이 묶이거나 손실을 보는 위험이 따른다.

▷국내 주식시장에 크레스트 시큐리티스라는 기업사냥꾼이 출현했다. 영국계 버진아일랜드에 근거를 둔 페이퍼컴퍼니로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펀드이다. 이달 들어 두 차례에 걸쳐 SK㈜ 지분 12.39%를 매입해 단숨에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SK㈜는 SK텔레콤의 최대주주이며 사실상 SK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해온 회사여서 SK 경영진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이 펀드가 경영권 탈취를 노리는 것인지, SK측을 위협해 비싼 값에 지분을 되파는 그린메일을 하려는 것인지, 단순히 주식시장에서 차익을 거두려는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어느 쪽이든 자본 이동이 완전 개방된 세계화시대에 기업의 경영권 방어가 간단치 않은 일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상영 논설위원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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