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최정호/진보와 보수를 넘어서

  • 입력 2003년 4월 13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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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거창한 얘기 같아 겸연쩍긴 하지만 무릇 생명이란 지저분한 것 속에서 태어난다고 나는 믿고 있다. 프랑스의 한 시인은 “만일 사람이 생명의 창조행위를 스스로 관찰한다면 인류는 멸종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마도 그런 결벽주의에서 ‘청정수태(淸淨受胎)’라는 신학적인 요청이 나왔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종교인이 아닌 나는 이를 믿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 생명의 창조와 탄생 과정이 설혹 지저분하다고 하더라도 이를 부정하기보다 그럴수록 이를 긍정적으로 보아주고 싶은 너그러운 나이가 되었다. 늙은이가 되었다는 얘기다.

▼이념보다 ‘현실의 삶’ 더 중요 ▼

인간 생명의 탄생만이 아니다. 국가 공동체의 탄생도 마찬가지다. 나라마다 갖는 ‘건국신화’는 권력욕의 간음 속에서 태어난 국가 공동체의 지저분한 ‘태생적 한계’를 미화하기 위한 ‘정치적 청정수태설’로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무정부주의자는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적인 모든 것의 성립 과정은 빈정댈 수 있는 관찰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빈정댐이란 무용지물”이라고 한 철학자 니체의 말을 수긍한다.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할 때 그가 적출이냐 서출이냐 하는 걸 더 이상 묻지 않는, 개화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건국에서도 소위 민족사의 정통성을 따지는 적서(嫡庶)논쟁은 비생산적인 한가로운 담론이라 할 것이다.

사람의 출신성분보다 그 사람의 능력과 성취가 중요한 것처럼 국가도 건국 과정보다는 건국 이후가 더욱 중요하다.

나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 3·1운동과 상하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알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에 내 마음을 송두리째 줄 수는 없었다. 만일 ‘민족사적 정통성’을 갖는 적출의 정부가 1인 독재 치하에서 대부분의 국민을 굶기고 핍박한다면 차라리 서출이라도 민주화되고 국민이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나는 내 나라, 나의 조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1950년 6·25전쟁 이전까지 많은 남쪽의 지식인들이 북쪽에 그러한 나라가 있다고 믿고 월북했다.

그러다 인민군의 남침으로 “저 산 너머 저 쪽에 행복이 있다네”라고 믿었던 ‘인공(人共)’의 실상이 석 달 동안 현전(現前)하면서 보이지 않은 것을 미화하는 남한 지식인의 좌경화 바람은 가라앉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때 다른 대안이 없어 대한민국을 할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1960년 4·19혁명은 남한의 민주화를 향한 거대한 시민적 역량을 내외에 과시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진정 ‘내 나라, 내 조국’으로 자리 잡고 ‘사랑’ 받게 되었다.

1970년대, 통일 문제를 괄호 속에 넣어두고 상대방을 상호 승인하며 벌인 ‘선의의 경쟁’은 남북의 경제적 위상을 뿌리째 뒤집어 놓고 말았다. 광복 전 일제치하부터 내려온 ‘북의 공업지역, 남의 농업지역’이란 도식은 남한의 중화학공업화를 가져온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역사의 대과거가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비단 ‘사랑’하는 내 나라일 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내 나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려갔다.

▼‘국민의 잘사는 나라’가 우선 ▼

광복 후 한반도에 두 국가 권력이 성립된 과정을 그 뒤에 태어난 세대처럼 이념으로 윤색된 건국 ‘신화’가 아니라 벌거벗은 현실로써 체험한 세대는 갈수록 역사의 저편으로 스러져가고 있다. 그렇기에 더 늦기 전에 이것만은 밝혀두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쪽 국가와 국민의 삶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오랜 여정을 겪어 대한민국을 ‘내 나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남쪽을 사랑하는 것이 ‘보수’라면 나는 보수란 말을 감수하겠다. 그 대신 1인 세습독재 체제하에서 수백만명의 주민이 굶주려도 그러한 동포의 인권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진보’라면 나는 진보의 영예를 기꺼이 사양하련다. 진보나 보수의 이념이 문제가 아니다. 북녘 동포의 현실적 삶이 더욱 중요하고 다급한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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