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새는'…순정이 꽃피던 시절을 찾아서

  • 입력 2003년 4월 11일 17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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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대기자 sannae@donga.com
박영대기자 sannae@donga.com
◇새는/박현욱 지음/288쪽 8000원 문학동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서 TV를 켰다. 박찬호가 선발투수로 나온 메이저리그 경기를 생중계하고 있다. ‘나’는 박찬호나 김병현이 몇 승을 하는지, 연봉을 얼마나 받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 국내 프로야구 경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도 한때 야구를 보며 환호하고 투수의 공 하나, 타자의 스윙 하나에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제각기 다 자신의 시절이 있다.’

소설가 박현욱(36)은 ‘나’, 곧 ‘은호’의 목소리에 ‘순정의 시절’을 싣는다. 찰스 디킨스가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말한 것처럼 ‘그때가 가장 좋은 시기였다’고.

은호는 라디오나 LP에서 정성 들여 가려 뽑은 노래를 녹음한 이른바 ‘편집 테이프’를 집어 들어 되감는다. 감기는 테이프와 함께 기억의 수레바퀴가 돌아간다. 애틋한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70, 80년대의 문화적 코드는 67년생 작가와 그 세대를 위한 기록이다. 전자오락 갤러그와 나이키 운동화, 죠다쉬 청바지, 야구선수 장효조와 최동원….

1980년대 중반 지방 중소도시의 고등학생인 은호는 집 나간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진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다. 나이키는커녕 프로월드컵 운동화조차 어림없다. 말표 운동화에다 공부도 못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학교에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아이’다.

은호는 학교 수돗가에서 우연히 여학생반 반장 정은수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은호는 그저 은수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친구 호철이 해 준 “학교 음악제에서 클래식 기타 치던 형한테 여자애들이 완전히 뿅 가더라”는 조언에 은호는 신문배달을 해 기타를 산 뒤 학원에 다닌다. 은수의 눈에 들기 위해 1학년 내내 기타에 매달린 은호는 그 일이 여의치 않자 은수가 활동하는 문예반에 들어간다.

카뮈의 ‘이방인’과 카프카의 ‘성’을 읽으며 해설도 달달 외워 보지만 독서토론회에서 입 한번 떼기가 어렵다. 그러나 음지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은호는 제일모직의 ‘맥그리거’를 입고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좋은 반장 민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준다. 자신감을 얻은 은호는 은수에게 고백한다. “우리는 고3이고, 대입 시험 끝난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는 은수의 모범 답안.

이제 은호는 필사적으로 공부를 파고든다. 기타 학원에서 만난 여학생 현주가 은호의 훌륭한 과외 선생이자 문학 선생의 역할을 하며 남몰래 마음 아파하고…. 마침내 은호는 서울의 유명 대학에 합격한다. 현주는 은호를, 은호는 은수를 바라보는 일방향의 관계는 종래에 사랑과 우정이 엇갈린 채 한 시절을 뒤로 보내고 만다.

최근 서울 대학로에서 작가 박현욱을 만났다. 생각보다 말수가 적었다.

“기호보다 의미가 승했던 80년대를 재해석할 수 있는 시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90년대 들어서 소설이 대중문화를 영입해 가는 과정에서 외국의 것이 중심이 돼 왔는데 우리 대중문화를 소설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누군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는 은호에게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독자가 읽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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