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빌리 브란트'…2개의 독일 인정

  • 입력 2003년 2월 28일 17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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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의 가장 큰 성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나라, 즉 ‘독일’과 ‘평화’라는 개념이 다시금 조화를 이루는 데 기여한 것입니다.”빌리 브란트(1913∼1992). 그는 최초의 사민당 출신 서독 총리로 동서냉전기에 동독과 동구권 국가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동서화해를 지향하는 ‘동방정책’을 추진했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칭송됐다. 그러나 ‘동방정책’ ‘독일 통일’과 함께 기억되는 이 영광의 이름 뒤에는 “삶은 좌절의 연속”이라며 가슴 아파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 온 또 하나의 삶이 있다.》

빌리 브란트/그레고어 쇨겐 지음/김현성 옮김/375쪽/1만9000원/빗살무늬

사생아였던 어머니에게서 역시 사생아로 태어나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소년, 나치에 저항하기 위해 목숨 걸고 조국을 등져야 했으나 귀국한 후 조국의 배신자로 낙인찍혀야 했던 투쟁가, 선거 때마다 이념 공세와 인신 공격과 여자관계 문제로 시달리며 좌절에 좌절을 거듭해야 했던 정치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1970년 바르샤바를 방문해 유대인 학살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이 모습은 평화를 지향하는 그의 ‘동방정책’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세계에 전해졌다.사진제공 빗살무늬

독일 에어랑엔대 교수(현대사)인 저자는 치밀한 문헌 고증을 통해 ‘인간 빌리 브란트’를 격동의 독일현대사와 함께 생생하게 되살려 냈다. 저자는 ‘연방 총리 빌리 브란트 재단’ 이사 겸 ‘베를린 빌리 브란트 판본’의 공동편집자로 브란트에 관한 한 최고 수준의 전문가다.

일찍부터 정치에 관심이 높았던 고등학생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은 1930년 17세의 나이로 사민당 당원이 됐고, 그 다음해에는 사민당을 탈당해 더 좌파진영에 속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에 가입했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지하 저항단체에 들어가 ‘빌리 브란트’란 가명을 사용했고 망명과 잠입을 반복하며 나치에 투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베를린에 돌아온 그는 1948년 나치에 박탈당했던 국적을 다시 취득한 후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57년 베를린 시장에 취임해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것을 직접 경험했던 그는 1966년 외무장관이 되자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1969년 10월21일 단 3표차로 총리에 선출된 후 본격적으로 ‘동방정책’을 정착시켰다.

서독의 기존 외교정책이었던 ‘할슈타인원칙’, 즉 ‘소련 이외에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동독 고립정책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접근외교’를 시도한 것이다. 1970년 바르샤바를 방문한 그는 유대인 학살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그 모습은 그의 ‘동방정책’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전세계에 전해지며 ‘강대국 독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불안도 가라앉혔다.

그러나 브란트는 동서냉전기에 이 정책을 추진하며 정적들로부터 ‘조국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고 이념공세와 흑색선전에 시달려야 했다. 야당은 1972년 그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강행했지만 국민은 그와 그의 정책을 지지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 선거에서 브란트의 사민당은 45.8%의 지지를 얻었고 이는 사민당 역사상 최대의 승리였다.

그의 삶에서 고난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절정에 있던 1974년, 총리실 비서 기욤이 동독 국가안전국의 간첩이었다는 ‘기욤사건’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됐고, 그 후 평화운동에 헌신하다가 췌장암 진단을 받은 뒤 1992년 10월8일 79세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독일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로 추앙되고 있다. 그의 삶은 ‘인간이란 모든 싸움에서 승리할 필요는 없는 존재’임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었다. 미래를 향한 전진을 가로막는 자신과 독일 역사의 수많은 아픈 기억을 헤쳐 나온 그 힘에 대해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불굴의 신뢰와 자기 희생과 확실한 연대에 대한 ‘이해’.”

이것은 역사가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이해’였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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