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구자룡/‘기업 입조심’

  • 입력 2003년 2월 27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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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민감한 시기에 ‘그런 설문조사’에 참여해서 뭐가 좋겠습니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오해를 살 만한 일은 하지 말아야지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본보 27일자 B3면 보도)를 위해 각 업체에 질문지를 돌리던 본보 경제부 기자들은 이런 말을 들으며 뜻밖의 어려움을 겪었다. 회사 이름 아니면 CEO 이름이라도 빼 달라는 업체들이 많았다. 아예 응답을 거절하는 업체들도 있었다.

조사 설문은 새 정부의 경제정책에 포함된 ‘재벌 개혁’에 대해 대기업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 7개 항목이었다. 따라서 별 어려움 없이 조사를 마칠 것으로 봤으나 기업인들이 속내를 잘 열지 않았다.

“절대로 설문에 응하지 말라는 회사의 지시가 있었다” “공기업이기 때문에 더 몸조심을 해야 하는 심정을 이해해 달라” “CEO가 지방 출장 중이어서…” 거절의 이유도 가지가지였다.

모 업체는 심지어 “우리 회사 사장님 이름이 명단에 소개되면 경쟁사 CEO 이름도 꼭 함께 소개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명단이 함께 실려야 그나마 ‘덜 찍힌다’는 의미였다.

기업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공개적인 토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점은 업계 스스로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한 업계 관계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업 군기잡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각 개인의 응답 내용이 ‘숫자의 통계’ 뒤로 숨는 설문 조사에도 이런저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과거 정권 때의 경험들이 몸에 배어서일까, 지금도 그럴만한 두려움의 근거가 있는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27일 내각을 소개하면서 “SK 등에 대한 수사는 청와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몰아치기식 수사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을 거듭 내비쳤다. 그런데도 ‘참여정부’가 출발하는 시점에 기업인들은 사실상 익명의 설문에도 ‘참여’하기를 꺼릴 정도로 바짝 움츠러들어 있다. 이유가 무엇이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며 빨리 해소돼야 할 일이다.

구자룡기자 경제부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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