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메르쿠리와 이창동

  • 입력 2003년 2월 27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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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 출신으로 그리스 문화부장관을 지낸 멜리나 메르쿠리는 1994년 69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6세 때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가 실패한 그는 배우로 변신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일요일은 참으세요’ 같은 영화에서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은막 스타로만 머물게 하진 않았다. 그리스 군사정권에 반대하다가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했으며 귀국 후에는 국회에 진출한다. 1981년 문화부장관에 입각한 그는 영국에 빼앗긴 그리스 문화재 ‘엘진 마블스’를 되찾는 운동에 헌신하다가 암으로 인생을 마감했다.

▷새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된 이창동 감독도 다채로운 인생을 살아온 점에서 메르쿠리와 흡사하다. 그는 교사생활을 하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한 문학청년이었지만 어느 날 영화감독으로 변신해 주위를 놀라게 한다. 그가 만든 영화는 예술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돈은 별로 벌리지 않았다. 지난해 ‘오아시스’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그가 ‘아내가 이젠 트로피 대신 돈을 가져오라고 할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힌 것은 ‘춥고 배고픈’ 순수예술가의 애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해 그는 최고의 해를 보냈다. ‘오아시스’로 국내외에서 상을 휩쓸다시피 하면서 찬사를 독차지했다. 연말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TV연설자로 모습을 나타내더니 올 들어 새 정부의 문화부장관 물망에 올랐다. 역대 문화부장관 가운데 문화인 출신은 이어령 장관 정도를 꼽을 수 있으나 학자의 면모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순수 문화인은 그가 처음이나 다름없다. 메르쿠리가 널리 평가받는 것은 배우보다는 문화부장관으로서의 활약 때문이었다. 그가 벌인 엘진 마블스 반환운동은 아직 성사되지 않고 있지만 세계인의 공감을 얻어냈다. 이 감독이 장관으로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가 궁금하다.

▷이 장관이 문화인 출신이라는 점은 분명 장점이지만 경우에 따라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문화의 보호논리는 우선되어야 하지만 문화인 입장에 서서 이를 지나치게 수용하다 보면 우리 문화를 폐쇄적인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 위험성도 있기 때문이다. 시민 입장에서 문화를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문화계에서는 벌써부터 정부 지원금을 둘러싸고 세력간 대립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문화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 전체를 문화의 ‘오아시스’로 만드는 것이 문화부의 목표라면 작은 문화계 이외에 전체 ‘사막’을 보는 눈도 지녀야 한다. 이창동 감독의 문화 인생은 지금부터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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