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베니스에서 죽다'

  • 입력 2003년 2월 21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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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 죽다/정찬 지음/338쪽 8500원 문학과지성사

△‘글자 너머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하지만 그가 갈 수 있는 길은 하나 뿐이다. 다른 길은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길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은빛 동전)

문학평론가 성민엽은 작가 정찬(50·사진)이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세계를 지킨다”고 평했다. 최근 펴낸 ‘베니스에서 죽다’에서도 작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독자들이 책을 읽고자 할 때 작가를 선택하지요. 작가도 독자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숱하게 널린 오락거리들, 또 그 속에서 산다는 삶 자체가 가볍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 존재에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고 싶어요. 근원과 본질에 가까운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사유와 생각들이 무질서하고 가볍고 즉흥적인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나름대로 생명의 에너지를 부여하는지도 모르죠.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누구에게도, 심지어 신에게조차 무릎을 꿇지 않았던 젊은 시절, 그는 소설 앞에서 기꺼이 무릎 꿇었다.… 이제 소설은 등불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이었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도태되는 것이 자본의 법칙이다.’(죽음의 질문)

‘죽음의 질문’ ‘숨겨진 존재’ 등 4편의 작품에서 작가는 소설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존재를 바라보면서, 그는 동시에 내면의 자신을 들여다본다.

“소설가는 길을 잃기가 참 쉽습니다. 작가는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소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감을 확보하지 못하지요. 지도가 없기 때문에 길을 잃기 쉽고 또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식 못해요. 자신을 냉철하게 관찰하는 정신의 눈, 즉 내면에 또 하나의 눈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이번 작품집에는 내 소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라는 행위의 결과가 담겼습니다.”

△‘빛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라져갔소. 나는 저 너머로 사라져 가는 사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집어 가슴 속에 집어넣었소.… 마지막 빛이 꺼지고 세계가 캄캄해졌을 때 가슴 속에 집어넣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기 시작했소.’(시인의 시간)

시간 앞에서 부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허용된 유일한 반란은 기억이라고 그는 잘라 말한다. 뒷걸음질쳐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탐색만이 존재의 정체를 밝히는 방법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기본적으로 회상의 형식을 띠고 있지요. 시간에 대한 응시와 천착이 소설의 바탕을 이루는 골격이 됩니다. 불완전한 현실로 인해 우리는 완전한 다른 상태를 그리워해요. 회상한다는 것은 지나간 아름다움에 대한 향수, 즉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다른 세계를 그리는 것이에요.”

‘베니스에서 죽다’는 정찬의 네 번째 소설집으로 11편의 단편을 통해 인간존재 탐구의 해법으로 기억을 제시하고 있다. 관념과 현실, 상상이 조밀하게 얽힌 작품들에는 곱씹는 재미가 내재돼 있다.

마지막 질문. 소설이란? “일상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끄집어내 미학적 형태로 형상화 시켜 보여주는 것! 그리고 가벼운 정신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깊이 들어가고 싶은 나의 희망.”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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