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화 국민의 정부]<5>兩甲 갈등과 동교동 분열

  • 입력 2003년 1월 29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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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이상 동교동 한솥밥을 먹어온 권노갑(왼쪽)과 한화갑은 2000년 8·30 전당대회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반목하기 시작한다. 그 배경에는 가신들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맡겼던 김대중 대통령의 ‘분할통치’ 방식이 있었다. 2000년 12월14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온 DJ의 귀국 환영식장에서 함께 자리한 ‘양갑’. -동아일보 자료사진
30년 이상 동교동 한솥밥을 먹어온 권노갑(왼쪽)과 한화갑은 2000년 8·30 전당대회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반목하기 시작한다. 그 배경에는 가신들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맡겼던 김대중 대통령의 ‘분할통치’ 방식이 있었다. 2000년 12월14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온 DJ의 귀국 환영식장에서 함께 자리한 ‘양갑’.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0년 8·30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내 유력자들의 암중 모색이 본격화하던 4월 말 어느 날. 한화갑(韓和甲) 의원의 핵심참모 K씨는 은밀히 이인제(李仁濟) 고문을 찾았다. 얼마 전 치러진 4·13 총선에서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이인제는 당시만 해도 당내에서 경쟁자가 없을 만큼 차기대권 후보로 유력한 상황이었다.

K씨는 “한화갑이 이번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한다. 이 고문은 대권이 목표 아니냐. 이번 최고위원 경선에서는 출마하지 말고 한화갑과 연대해라. 대신 지명직 최고위원을 하면 될 것 아니냐”고 말을 꺼냈다.

이인제는 “지명직 최고위원의 경우는 당 총재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의사가 중요한 것 아니냐”며 상당한 관심을 내비쳤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한화갑은 얼마 뒤 DJ를 만난 자리에서 “이인제를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기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고 DJ는 “그럴 수 있겠다”며 긍정적인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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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월2일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인제의 태도가 돌변했다. K씨의 증언.

“이인제를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미는 것을 전제로 한화갑-이인제 연대는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었다. 한화갑은 이미 총선 때부터 자금을 지원해주는 등 이인제에게 공을 들이고 있던 터여서 연대를 낙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돌아온 이인제가 갑자기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이인제가 경선출마로 방향을 바꾼 결정적 계기는 권노갑(權魯甲) 고문의 설득 때문이었다. K씨는 “당시 권노갑은 차기 대권과 관련해 ‘킹 메이커’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화갑-이인제 연대가 성사될 경우 자신의 입지가 없어질 것으로 판단해 이인제의 경선 출마를 적극 설득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권노갑의 측근 L씨도 “권노갑은 8·30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이 전국정당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런 차원에서 출마를 망설이던 이인제 등에게 ‘도와줄 테니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라’고 권유한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다만 이인제 의원은 “당시 한화갑측이 비공식적으로 연대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최고위원 출마를 결심한 것은 다음에 있을 대통령후보 경선에 대비해 대의원들과 미리 접촉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누구의 권유 때문은 아니다”고 말했다.

경위야 어떻든 최고위원 경선에 이인제가 출마하면서 권노갑이 이인제를 지원하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은 ‘동교동 한솥밥’을 먹어 온 권노갑과 한화갑, 이른바 ‘양갑’(兩甲)이 등을 돌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물론 양갑 갈등의 뿌리는 김대중 정부 출범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굳이 말하면 여권 내 신-구주류간 갈등도 감정의 앙금이 쌓이게 만든 원인(遠因)이었다. 한화갑은 98년 당시 국민회의 원내총무로 신주류인 김중권(金重權) 대통령비서실장과 긴밀한 교감 아래 한나라당 의원 영입을 적극 추진했다. 당 총재권한대행 김영배(金令培)와도 공조했다. 때문에 당시 여권 내에선 김중권-김영배-한화갑의 관계를 ‘3각 편대’라고까지 지칭했다.

반면 정권 초기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소외됐던 권노갑은 김중권과 철저히 대립하는 과정에서 ‘형님’ ‘동생’ 하며 지내온 한화갑과도 소원해졌다.

양갑 갈등이 표면화된 결정적인 원인은 DJ의 ‘분할통치’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동교동 내에서는 설득력 있게 나온다.

동교동계 한 핵심인사의 설명.

“당시 DJ는 한보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이미 정치적 상처를 입은 권노갑을 대신해 한화갑에게 당의 관리를 맡기려는 생각이 있었다. 8·30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에서 한화갑의 출마를 ‘허락’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실제 경선에서 DJ의 장남인 김홍일(金弘一) 의원이 한화갑 지지활동을 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DJ는 권노갑의 역할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DJ는 2000년 6월21일 한화갑을 만나 경선 출마를 허락한 뒤 바로 다음날 권노갑을 만나 그에게도 ‘최고위원 출마를 해도 좋다’고 재량권을 줬다. 그러다 보니 양갑 사이에 충돌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6월22일 DJ와 독대하고 나온 권노갑은 곧바로 경선 출마를 선언했으나 ‘구정치 회귀’라는 당내 반발에 밀려 곧바로 출마의사를 철회했다.

이 과정에서 동교동계는 양갑을 중심으로 줄서기를 하며 급속히 분열돼 갔다.

한화갑측의 한 인사는 “당시 동교동계 가운데 의원급인 Y, C씨, 실무자급인 P, C씨 등은 우리를 도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들 모두 권노갑의 눈치를 보면서 우리 캠프에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선 기간 중 한화갑을 지원한 동교동계 인사는 문희상(文喜相) 설훈(薛勳) 의원 정도였다.

권노갑이 한화갑을 ‘반대’한 데는 한화갑이 차기 대권 후보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도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권노갑측에서는 “호남, 그 중에서도 동교동계가 차기 대권을 생각한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한화갑이 과욕을 부린다”는 비판적인 얘기가 노골적으로 나왔다.

권노갑측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8·30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에서 한화갑은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여권 내부의 정치 역학구도 속에서 한화갑은 오히려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돼 갔다.

반면 최고위원 출마를 포기한 권노갑에게는 경선 출마 희망자들의 후원 요청이 줄을 잇는 등 오히려 ‘힘쏠림’ 현상이 나타났다. 권노갑은 경선이 한창이던 7월9일 정동영(鄭東泳) 김민석(金民錫) 등 젊은 최고위원 후보들과 골프를 함께하며 유대를 과시하기도 했고, 이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김근태(金槿泰)에게는 비서 M씨를 통해, 정동영에게는 부인이 운영하는 영등포 롯데백화점의 ‘돈가스집’에서 부인을 통해 각각 2000만원씩을 건넸다.

그는 2001년 들어서는 마포에 별도 사무실을 내고 민주당 출신 인사들의 공기업 진출을 위해 정부산하기관 인사에 직접 간여하기 시작했다.

한화갑의 소외는 인사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한화갑측은 “자격이 되는 사람이라도 우리가 인사부탁을 하면 오히려 탈락하는 상황이었다. 4·13 총선 전국구 후보 인선 때 의료계 대표 케이스로 영입된 P씨의 경우 명단 초안에서는 당선권 내에 들었으나 한화갑이 추천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최종 순간 한참 후순위로 밀려버린 일도 있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한화갑은 아예 인사추천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민주당 차기 대통령후보 경선의 전초전이 시작될 무렵인 2001년 8월 권노갑과 한화갑은 한 여권인사의 주선으로 ‘화해회동’을 갖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권노갑은 9월 당정개편 과정에서 대권불출마를 조건으로 한화갑을 당 대표로 밀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한화갑은 후보 경선 출마를 고집,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것이 사실상 두 사람의 마지막 화해 시도였고 양갑의 화해는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출범을 앞두고 DJ는 2003년 1월2일 “앞으로 동교동계라는 이름도 쓰지 말고 모임도 갖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나 DJ가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양갑 갈등으로 시작된 동교동계의 분열은 정치계보로서 동교동계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권노갑 人事개입 안팎▼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이 김대중 정부의 인사를 좌지우지했다는 것은 세간에서는 정설로 돼 있다.

권노갑측은 “DJ를 대신해 챙겨야 할 사람들의 뒤를 봐준 것뿐”이라고 해명하고 있고 실제 그 출발점은 당 출신 인사들의 취직이었다. 2000년 총선 공천에서 탈락한 전직 의원들이 대거 공기업이나 정부산하기관 임원으로 진출한 것도 모두 권노갑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권노갑의 한 측근 인사는 “2000년 4·13총선 이후 당 출신 인사의 공직 진출 기회가 생기면 청와대에서 권노갑에게 연락이 왔다. 당 기여도 등 검증작업을 권노갑이 담당한 것이다”고 말했다.

당시 청와대는 민정수석실의 직원 한 명을 아예 권노갑과의 ‘연락 창구’로 지정해 적극적인 협조를 했다.

2001년 민주당 3역을 지낸 P씨는 “당시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에게 당 관계자의 공기업 진출을 부탁했더니, ‘권노갑을 거쳐서 말하라’고 하더라. 권노갑의 위세가 그 정도인가 싶어 깜짝 놀랐었다”고 말했다.

권노갑측은 “공기업에 진출하는 사람에 한정해 취업알선을 했을 뿐 정부직 인사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권노갑의 인사개입은 DJ 정부의 국정난맥을 앞당기는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청와대 출신의 한 인사는 “사인(私人)이 인사를 좌우하다보면 능력보다 친소관계 등이 우선시되기 십상이다. DJ 정부 후반에 호남인사 독식 얘기가 나온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인사 검증을 사인에게 맡길 것 같으면 청와대의 검증시스템이 왜 필요하단 말이냐”고 지적했다.

권노갑의 인사개입에 대해선 2000년 말부터 당내에서부터 ‘국정농단’이라는 비판이 대두됐으나 권노갑은 2001년 들어서도 마포에 별도 사무실을 내고 인사추천을 계속했다.

▼특별취재팀 명단▼

▽팀장

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

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기자

▽경제부

반병희 차장

김동원 김두영 신석호기자

▽사회부

하종대 이명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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