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재호/‘인터넷 정치’

  • 입력 2003년 1월 12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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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는 조각을 앞두고 인터넷을 통해 고위공직자 후보를 추천받고 있다. 만약 추천을 통해 어떤 자리에 내정된 사람이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노 당선자는 이미 ‘빅4’에 해당되는 국가정보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국세청장까지도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인터넷 추천은 단순한 참고자료이니까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우선 국회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론’을 무시한 셈이 됐으니 말이다. 네티즌의 항의도 거셀 것이다. 이런 상황은 초보적이지만 이른바 인터넷 정치와 우리 정치의 근간인 대의 민주주의가 충돌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대의 민주주의란 국민이 자신들의 대표자를 뽑아서 그에게 일정한 권한을 위임하는 제도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만 실제로 법과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은 이들 위임받은 사람의 몫이다. 18세기 이래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였다. 미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서방 국가들도 여전히 이를 기본제도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 정치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직접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했던 시공간의 제약이 인터넷으로 해소됐으므로 공직자 선임을 비롯한 주요 국정 현안은 이제 위임받은 소수가 아닌 국민 전체의 선택에 맡길 수 있다고 믿는다.

민주주의의 원형은 직접 민주주의인데 클릭 한 번으로 국민 절대 다수의 판단을 구할 수 있게 됐으니 정치발전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정치의 잠재력과 순기능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의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실망에서 출발하고 있다.

위임받은 소수들이 제대로 국가를 운영해 왔다고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뽑아 줬지만 한 게 뭐 있느냐”는 것이다. 미국과 같은 대의 민주주의의 선진국에서도 사정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정치가 대의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200년 전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헌법을 만들면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직접 민주주의의 폐해였다. 그들은 개인의 권리가 다수 대중에 의해 침해받지 않을까 걱정했고,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이 민주주의의 옷을 입고 나타날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확고한 대의 민주주의였다. 대중의 목소리는 선출된 지도자들을 통해서 반영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인단 제도는 그러한 신념의 산물이었다.

미 공영방송 PBS의 대표를 지낸 로렌스 크로스맨은 95년 저서 ‘전자공화국’에서 이 같은 대의제도로 인한 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간격을 ‘헌법적 공간(Constitutional Space)’이라고 소개하면서 이 공간이 “미국식 공화주의가 갖고 있는 천재성”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말하자면 최적의 안전판이라는 것이다.

인터넷 정치가 바람직한 전자 민주주의 단계로 발전할 수 있으려면 어떤 형태로든 이런 공간이 필요하다. 네티즌의 시민 의식, 특히 익명의 그늘에 숨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용기와 책임감이 그런 공간에 해당되겠지만 역시 건강한 대의 민주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노 당선자의 인터넷 정치 실험은 본질적으로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장관 추천이 제대로 되느니 안 되느니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앞으로 더 확대될 인터넷 정치에 대해 최고 통치자로서 분명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무한대의 직접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인터넷 정치를 대의 민주주의보다 앞에 놓을 것인가, 뒤에 둘 것인가, 그 답을 듣고 싶은 것이다.

이재호 국제부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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