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곬]3대째 외길 서울 '종로양복점' 이경주사장

  • 입력 2003년 1월 5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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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양복점 창업주인 고 이두용씨의 손자로 3대째 가업을 이어 ‘양복장이’의 길을 걸어온 이경주 사장. 그의 꿈은 2016년 딸과 함께 이 양복점에 설립 100주년 기념 간판을 다는 것이다. -김경제기자
종로양복점 창업주인 고 이두용씨의 손자로 3대째 가업을 이어 ‘양복장이’의 길을 걸어온 이경주 사장. 그의 꿈은 2016년 딸과 함께 이 양복점에 설립 100주년 기념 간판을 다는 것이다. -김경제기자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근우빌딩. 계단 입구에 작은 간판이 있다. ‘Since 1916 종로양복점’. 이 건물 2층 10평 남짓한 가게에서 이경주(李景柱·58)씨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87년 동안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씨의 할아버지 이두용(李斗鎔·1882∼1942)씨는 일본 도쿄(東京) 양복학교를 졸업한 뒤 1916년 종로 보신각 옆에 한국 최초의 양복점인 종로양복점을 열었다.

바지와 저고리가 보편적이던 때라 소수의 멋쟁이들만 양복을 맞춰 입었다. 이시영(李始榮) 초대 부통령을 비롯해 당시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이 모두 이 집에 드나들었다. 과 독립운동가 김석원 장군도 자주 찾았다.

“드라마 ‘야인시대’ 주인공 김두한(金斗漢·1918∼1972)씨도 우리 가게 단골이었지요. 다른 곳 불량배나 일본 주먹패로부터 종로의 한국 상인들을 보호했다고 들었어요. 20여년간 우리 가게에서 양복을 해 입었다고 하더군요.”

길을 가다가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거나 돈이 궁해 사무실을 찾은 사람들에게 양복, 외투 등을 선뜻 벗어주곤 했다는 것은 김씨의 유명한 일화. 한인 고학생들이 학비를 부탁하러 찾아오면 “전당포에서 돈과 바꾸어 써라”며 입은 옷을 바로 벗어주었다. 때문에 그는 평생 늘 두 벌의 양복을 번갈아 가며 입었다고 한다.

한때 함흥에도 지점을 내며 200여명의 직원을 거느렸던 이 양복점은 그러나 당시 일본인 경쟁자들의 시샘을 한 몸에 받았다. 창업주 이씨는 괜한 누명을 써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42년 창업주 이씨가 사망한 뒤로는 그의 네 번째 아들 이해주(李海注·1916∼1996)씨가 54년간 양복점을 운영했다. 한국 양복사의 산증인으로, 94년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 기념 타임캡슐에도 사진이 실렸다.

“아버지는 아무리 솜씨가 좋아도 손님이 만족하지 않는 양복은 잘못 만든 것이라고 하셨죠.” 그는 노환으로 사망하기 한 달 전까지도 가게를 지켰다.

3대째 가게를 이어받은 이씨는 원래 건축학도였다. 가업을 잇는다며 1968년 시작한 양복 재단이 너무 힘들어 몇 번이나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그 자신이 4대째 양복점을 어떻게 잇게 할지 고민하는 나이가 됐다.

“미술대학에 다니는 아들에게 넌지시 뜻을 물었지만 대답이 없어요. 의상학을 전공한 딸이 아무래도 4대째를 이을 것 같습니다.”

맞춤 양복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양복점 규모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2016년 딸과 함께 설립 100주년 기념 간판을 다는 것이 이씨의 꿈이다.

“양복 만들 때 재는 20가지 신체 치수가 같은 사람은 평생 한 명도 본 적이 없어요. 그만큼 사람 몸은 개성이 강하다는 겁니다.”

몸이란 세월을 담아내기 마련이어서 단골이라도 옷을 맞출 때마다 치수를 다시 잰다는 이씨는 입어서 편한 옷을 최고의 옷으로 친다.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본을 떠서 만든 맞춤복을 기성복에 비할 수 없다고 자부한다.

“옷이 날개라고 하잖아요. 옷을 만들어 주는 일은 사람들에게 새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아요.” 35년째 고집스레 한길을 걸어온 ‘양복장이’의 말이다.

곽민영기자 havef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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