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곬]7代째 조선도공의 맥 잇는 '도예명장' 이학천씨

  • 입력 2002년 10월 27일 18시 19분


퇴계 선생의 24대손으로 7대째 조선도공의 맥을 잇고 있는 도예가 이학천씨. - 문경=이권효기자
퇴계 선생의 24대손으로 7대째 조선도공의 맥을 잇고 있는 도예가 이학천씨. - 문경=이권효기자
백두대간 줄기 가운데 비교적 높은 대미산(大美山·1116m)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정면으로 황장산이 누운 부처의 얼굴처럼 보인다 해서 관음(觀音)마을이다. ‘대미산’이라는 이름도 이곳을 즐겨 찾았던 퇴계 이황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이학천(李鶴天·41)씨는 이곳 해발 500m 중턱 나지막한 ‘묵심도요(默心陶窯)’에서 문경새재 박달나무로 만든 발 물레를 돌리고 장작불을 붙이며 도자기를 ‘짓는다’. 그는 지난달 노동부가 선정한 ‘대한민국 도예 명장(名匠)’에도 올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도예 명장으로 선정된 ‘도공(陶工)’은 5명. 경남과 충북에 한 명씩 있고 나머지 3명이 이곳 문경사람이다. 나이로 치면 도예 명장이 되기에는 아직 어리지만 열두 살 되던 해부터 도자기를 짓기 시작해 올해로 꼭 30년이 지났다.

“가업을 이어 도자기를 지었던 아버지는 평생 전국의 도요지를 돌아다니며 도자기를 연구했어요. 열 살쯤 됐을 때부터 아버지가 지은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도자기와 만났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평생 도자기 짓는 것을 어릴 때부터 보며 자란 저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죠.”

그는 퇴계 선생의 24대손이다. 자신은 18세기 중엽 조선 영조 때 이명태(李命泰) 선생을 시작으로 7대째 조선 도공의 맥을 잇고 있다. 3대까지는 퇴계 선생의 고향이기도 한 안동 도산면에서 도자기를 짓다가 4대 증조부에 이르러 이곳 문경으로 왔다.

“당시에는 도자기 일을 하면 천한 사람으로 여겼답니다. 양반 핏줄인데 도자기를 굽는다고 문중에서 쫓아내다시피 한 것 같아요. 1대 할아버지가 도자기를 시작한 까닭은 당시 집안에 있던 비기(秘記)에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나와야 집안이 흥한다’는 구절 때문인데, 아마 이것이 큰 영향을 미쳤나 봅니다.”

그는 도자기를 ‘만든다’거나 ‘굽는다’는 말 대신 ‘짓는다’는 말을 고집했다. ‘밥을 만든다’는 말 대신 ‘짓는다’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했다. 도자기는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흙에 정신을 불어넣고 생명처럼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라는 것. 조선 도공의 마음도 이러했을 것이다.

“장작가마에서 나온 그릇과 가스가마에서 나온 그릇은 아주 달라요. 겉모양은 거의 같지만 느낌으로 구별됩니다. 장작불을 붙인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요. 가마의 문을 제대로 닫지 않으면 도자기가 잘 안 나오고, 문의 위치가 달라도 도자기가 잘 익지 않아요. 진사(辰砂)백자라는 게 있어요. 그림이나 무늬를 그려 넣지 않은 백자를 짓는데 장작불 속에서 저절로 무늬가 그려지는 경우예요. 가스가마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지요. ‘진사’는 그날의 날씨, 습도, 바람, 유약 상태, 불의 열량 등이 맞아떨어질 때 생기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도공의 정성이나 기도 같은 것도 관련 있는 듯하고요.”

그는 이제 겨우 도자기가 무엇인지 ‘감(感)’이 온다고 했다. 30년 동안 한마음을 쏟았더니 비로소 도자기에 입문(入門)하는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을 거슬러 수 백년 전 조선 도공과 함께 호흡하고픈 마음만이 오직 가치 있는 것이라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것만이 조선 찻사발이나 백자에 담긴 ‘큰마음’이라고도 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을 따라 해발 500m의 외진 곳이지만 찾아오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데니스 코모 주한 캐나다 대사도 그런 손님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올 4월 가족과 함께 이곳 ‘묵심도요’를 찾아 도자기에 담기는 큰마음을 엿보았다. 이씨의 도자기에 반한 코모 대사는 나아가 한국-캐나다 수교 40년이 되는 내년 3월 대사관저에 이씨가 한창 짓고 있는 그릇 100여점을 가져다 주한 95개국 대사 및 영사가 참여한 가운데 감상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윤정국기자 jk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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