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전승훈/´패가망신´과 ´반지의 제왕´

  • 입력 2002년 12월 29일 17시 58분


“새 정부에선 인사청탁을 잘못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경고해 달라.”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최근 민주당 연수회에서 한 이 발언이 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아무리 부정부패 일소를 강조하는 수사학(修辭學)적 표현이라고 해도, 대통령당선자의 초법적인 ‘패가망신’이란 표현은 사람들을 사뭇 두렵게 하는 절대권력의 그림자를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 ‘반지의 제왕-두개의 탑’에서도 절대 악을 청산하면서 스스로도 ‘절대 권력’의 유혹에 취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평화를 위해 모인 반지원정대원끼리 반지를 놓고 다투다 죽는가 하면, 반지운반을 책임진 프로도마저 절대반지의 힘에 끝없이 갈등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절대반지’는 착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리지 않고 부패와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이 영화가 다른 어드벤처 무비와 차별되는 점은 반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과정”이라고 지적한다. 즉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스스로 ‘절대 권력’의 욕망을 버릴 때 가능하다는 것이 원작자인 J R R 톨킨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1950년대엔 2차대전 당시 나치와 연합군, 1960년대엔 반전 평화주의자들의 상징으로 읽혔다. 9·11테러 이후 미국은 북한의 핵과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등을 ‘절대반지’로 규정하며 전세계 국가들에 ‘반지원정대’를 조직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시사주간지 타임은 미국은 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프로도’이면서, 스스로도 절대반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골룸’(500년간 반지의 주인으로 뼈만 앙상히 남은 욕망의 화신)일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국민들은 노무현 당선자에게도 정경유착과 부패권력의 ‘절대반지’를 파괴할 ‘반지원정대’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을 쥔 이상 ‘절대반지’를 휘두르고 싶은 유혹은 끊임없을 것이다. DJ정부의 ‘내각제 약속’처럼 노 당선자의 ‘분권형 대통령제’ 약속도 집권 2기로 미뤄지며 휴지조각이 될 가능성도 크다.

노 당선자가 반지 파괴의 임무를 완수하고 영웅이 되는 ‘프로도’가 될지, 아니면 ‘골룸’의 길을 택할지 궁금하다.

전승훈기자 문화부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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