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영균/차라리 공약을 잊어라

  • 입력 2002년 12월 17일 19시 10분


경실련은 이회창, 노무현 후보의 대선 공약에 대해 ‘나열과 분산만 있다’고 혹평했다. 국민의 혈세를 제대로 쓰려면 꼭 필요한 사업을 골라 집중해야 하는데 과욕 때문에 ‘백화점식 공약’이 되고 말았다는 비판이다.

우선순위를 가려 한가지라도 제대로 청사진을 보여줘야 한다. 예컨대 ‘수도이전’공약 하나라도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어야 하고, 비판하는 상대방은 근거 있는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수도가 이전하면 50만명이 옮겨가는 것인지, 아니면 100만명이 가는 것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교통체증이 해소된다지만 구호만 있을 뿐 시행 방안은 없고, 집값이 떨어진다는 것도 막연하게 불안감만 조장할 뿐이다. 이래서야 유권자들이 공약의 우열을 가릴 수 있겠는가.

‘교육문제’나 ‘의료문제’도 마찬가지다. 구호만 거창한 ‘미완성 공약’을 내걸고 표를 달라는 것은 무리한 주문이다. 자동차 세일즈맨이 차체에 엔진만 덜렁 얹은 자동차를 사달라고 떼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실속 없는 ‘거품 공약’부터 실현성이 떨어지는 ‘엉터리 공약’에 이르기까지 수준 미달의 공약이 유권자를 유혹하고 있다. ‘○○예산 2배 이상 확대’처럼 확실한 수치가 귀를 솔깃하게 하지만 실은 허구인 경우가 많다. 특정 지역이나 계층을 위해 선심을 쓰는 양 내놓는 ‘사탕발림 공약’이나 상대방이 먼저 발표하니까 뒤따라 내놓는 ‘물타기 공약’이 아닌지도 살펴야 한다.

공약은 지켜질 때에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당장 듣기에는 달콤하지만 따져보면 도저히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헛공약’을 내놓는 것은 유권자를 깔보는 짓이다. 속아서 찍어주면 좋고 안 찍어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속셈으로 ‘가짜 공약’을 남발한다면 ‘국민을 상대로 한 사기’나 진배없다.

하기야 ‘사기성 공약’이나 ‘사탕발림 공약’은 실현되어도 문제다. 구체적인 준비 없이 인기를 얻기 위해 내건 공약을 겁없이 추진할 때 빚어지는 부작용은 이미 겪어보지 않았던가. 5년 전 대선 때 당시 김대중 후보가 내놓은 의료분야의 개혁 공약도 그중 하나다. 김대중 대통령은 역대 정권이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의약분업과 건강보험통합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지경이었다. 의약분업을 실시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의료대란의 악몽은 잊지 못할 정도다. 그뿐인가. 의료정책의 실패로 국민이 떠안은 돈이 사실상 수조원에 이르고 의료보험료는 거의 2배로 올랐다고 한다.

비단 의료개혁만이 아니다. 선심성 공약일수록 유권자들에겐 부담만 준다. 세금을 더 걷지 않고 무슨 돈으로 그 많은 약속을 지킨다는 말인가. 지난 지방선거 때 한 연구소가 따져본 결과 당선자들의 공약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재원이 우리나라 한해 예산의 17배나 되었다니 이쯤 되면 말뿐인 공약이 아닌가.

이런 공약이라면 아예 내걸지 말았어야 옳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나 약속이라도 우리 여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재고되어야 한다. 당선되고 나서 준비도 없이 약속을 지킨답시고 무리하느라 국민에게 부담만 주는 대통령은 자격이 없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결과를 책임지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후보들이여, 당선되고 나면 차라리 공약을 잊으시라.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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