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착각' 이 빚은 단일화 후유증

  • 입력 2002년 11월 27일 18시 25분


‘세계 역사상 처음’ 여론조사 방식으로 결판난 민주당 노무현(盧武鉉)-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후보간의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은 정치판에서 구전(口傳)돼온 오랜 경구를 다시 상기시켜 준다.

“위대한 정치적 합의는 ‘착각’의 산물이다.”

두 사람이 15일 밤 국회에서 만나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 방식에 전격 합의한 ‘결단’의 이면에도 ‘분열하면 필패(必敗)’란 절박함 외에 어느 쪽의 착각이었든, ‘내가 이긴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음은 물론이다. 실제 노 후보는 “TV 토론만 벌어지면…”이란 계산을, 정 후보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노 후보를 지지하는 ‘역(逆)선택’만 차단하면…”이란 확신을 각각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런 경위야 두 진영의 ‘집안사정’이라 치더라도 문제는 회동 후 포장마차에서 ‘러브샷’까지 나누었던 감동적 합의가 ‘착각’이 빚어낸 다른 부산물 때문에 색이 바랠지 모른다는 우려를 안겨주고 있는 점이다. 정 후보가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패배한 직후인 25일 노 후보와의 회동에서 던진 ‘2004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요구가 선거공조의 핵심쟁점으로 불거졌기 때문이다. 이 뒤늦은 요구에 대해 정 후보측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예선전’에서 질 리 없다고 생각해 ‘본선’ 공약으로 내놓으려 했다”고 ‘착각’ 때문에 비롯된 일임을 인정했다.

따지고 보면 선거공조를 하자는 마당에 ‘권력분산의 틀’을 정하자는 정 후보측의 요구를 무리라고 탓할 수만은 없다. 더욱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권력운용시스템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정치권 전반의 공감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핵심은 비록 시간적 제약에 쫓기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대선 후보 단일화라는 역사적 합의의 중심에 정작 가장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는 대목이다. 15일 밤 두 사람이 합의한 8개항 가운데 그나마 정책방향이라 할 만한 ‘낡은 정치 청산’에 대한 내용은 7번째 항에 끼어 있었다. 심지어 합의 직후 정 후보는 “민주주의에 있어 절차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정략적 밀실야합’이란 비난을 샀던 97년 DJP 연합의 경우도 2년여의 산고(産苦) 끝에 ‘내각제 개헌’을 앞세워 이뤄진 것이었다. 그 당시는 ‘50년만의 정권교체’란 시대적 요구와 명분도 있었다. 나눠먹기에도 최소한의 ‘미학’이 있었던 셈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해도 연립정권을 만들기에 앞서 최우선적 과제는 항상 ‘정책합의’를 도출해내는 일이다. 자민당의 ‘38년 일당지배’를 종식시켰던 93년 6월 총선 직후 좌파에서 우파를 총망라한 7개 정파의 간사장급 대표가 만나 제일 먼저 한 일도 바로 ‘정치 개혁’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고 정책적 이견을 조율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노-정 후보단일화 협상이 전격 타결된 직후 만난 한 일본인 친구가 제일 먼저 내게 던졌던 질문도 “한국정치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정책협의는 언제 하느냐”는 것이었다.

대답에 궁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후보단일화 합의가 아무래도 ‘조건을 따져보지 않고 덜컥 저지른 결혼’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동관 정치부 차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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