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소설 뒤켠에 웅크린 ‘괴물’과의 만남 ´포스트잇´

  • 입력 2002년 10월 4일 17시 22분


◇포스트잇/김영하 지음/244쪽 8500원 현대문학

9월초, 최인호 소설 ‘영혼의 새벽’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소설가 김영하(33)를 처음 만났다. 모임이 지속되는 동안 그의 목소리가 시간을 메운 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무슨 주제로든 그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기자의 귀는 쫑긋 모아져 강력한 흡입력으로 그것들을 그러 모았다.

날 선 칼로 세상에 무심히 널려 있는 것들을 부리는 재주와 더불어 묘하게 냉소적인 말투, 풍요롭게 길어내는 현학과 위트까지. 이제 알고보니 그는 그렇게 자신의 ‘지하실’에 숨은, 털이 북슬북슬한 ‘괴물’의 손을 맞잡곤 했던 것이다.

그가 등단 후 7년 동안 쓴 여러 산문을 모은 ‘포스트잇(Post it)’의 매력은, 소설 뒤켠에 웅크리고 있었던 김영하의 ‘괴물’과 만나는데 있다. 그 괴물을 너무도 담담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사람들이 놀라워하든 뜨악해하든 웃겨서 넘어가든, 아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

산문집 ‘포스트잇’을 낸 소설가 김영하.동아일보 자료사진

그는 ‘말표구두약’을 집어 이리저리 살펴보고, 난데없이 ‘에프킬라’를 칙 뿌려댄다.

군 생활을 헌병대에서 했던 그의, 광나게 구두 닦는 법을 읽을 때면 참으로 감탄스럽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구두약의 상표가 모두 발굽동물을 상징하고 있다는, 또 구두닦이 다음으로 구두약의 최대 소비자일지 모르는 헌병과 이 동물들을 연관짓는 통찰이 유쾌하다.

에프킬라의 ‘장수’ 원인을 분석하면서 ‘에프(F)’ 발음을 할 때 윗입술과 앞니 사이로 새어 나가는 바람이 살충제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축공기를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또 살인자의 냉혹한 이미지를 주는 ‘킬라’도 한몫을 한다고 그는 설명한다.

또 순정만화풍의 용모와 기가 막힌 대금 연주 실력으로 신의 불공평함을 새삼 확인시켰던 대학 선배의 눈물과 ‘불행아’라는 노래를 꿀꺽 삼키기도 한다. 자신은 인생의 불행에 대해 손톱만큼도 몰랐으면서 ‘불행아’를 부르곤 했다고 털어 놓는다.

자신의 책을 읽은 ‘분’과 안 읽은 ‘놈’으로 분류하는 이가 맞닥뜨린 저자와의 만남과 책읽기. 특히 사람들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숭고한 동기를 지닌, 실용서의 저자들에게 그는 찬사를 보낸다.

주변의 것들을 살피는 시선을 통해 세상을 보는 그의 스펙트럼과 빛깔을 알 수 있다면, 문학하는 이로서 자기 내면에 들이 댄 돋보기는 그의 작품과 좀 더 내밀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괴로웠던 문제는 자신이 “지극히 평범한 존재”라는데 있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것이 그의 콤플렉스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넌 네가 아주 별나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묻더란다. 누군가는 ‘평범한’ 그가 문단에서는 오히려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도시에서 자랐고, 가족보다는 사회적 관계에 몰두했으며, 컴퓨터와 대중문화에 친근감을 느끼는, 80년대에 별로 빚진 것 없는 역설적 의미의 별종, 문제적 인간이라는 것. 그는 평범한 자신을 저주하며 매일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쓰기로 했다.

작품의 단서가 됐고 앞으로 될, 유쾌하고 때로는 가슴 먹먹할 정도로 솔직한 김영하의 단상들은 말 그대로 길지 않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탈부착이 가능한 ‘포스트잇’처럼 일상의 이곳 저곳에 와서 붙는다.

‘아무 흔적없이 떨어졌다 별 저항없이 다시 붙는, 포스트잇 같은 관계들. 여태 이루지 못한, 내 은밀한 유토피아이즘.’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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