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고향 느티나무는 지금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 입력 2002년 10월 4일 17시 15분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정동주 지음 윤병삼 사진/272쪽 1만5000원 이룸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와 대화를 나눈다면? 이 책은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나무 근처에서 맴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말을 통해 가닥을 잡은 느티나무의 역사를 뒤져낸 책이다. 머리와 발 가슴을 총동원한 글쓰기로 저자는 한국인의 마음자리를 비춰내고 있다.

시인의 상상력과 사료고증, 인류학적 현지조사라는 방법론이 총동원되어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풍경은 단순히, 사생의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자리를 파고 들어와 때로는 회한이 되기도 하고 안식이 되기도 한다. 구술, 문헌 연구, 거시와 미시, 생활사와 심성사의 복원이라는 현대 인문학의 여러 논쟁을 저자는 가볍게 뛰어넘고 있다.

댐공사, 공장 부지 편입이라는 근대주의의 홍수 속에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들은 잘려 나간다. 어떤 느티나무는 아이들의 철없는 불장난으로 없어질 뻔한 것을 마을 사람들이 나서 구사 일생을 시킨 사례도 있다. 까맣게 그을린 느티나무의 소생을 기원하는 가운데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한 곳으로 몰린다. 기원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을린 느티나무 사이로 새순이 돋고 마을 사람들은 안도와 기쁨, 느티나무의 저력을 동시에 느낀다.

남해군 삼동면에 있는 은점 느티나무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잎들이 뻗어있어 마치 바람을 맞이하는 예절바른 몸짓같이 보인다. 사진제공 이룸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는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왜란도 있고 호란도 있다. 왜군과 호군의 추격을 피해 숨은 마을 아낙네의 이야기, 아낙네를 숨겨주는 마을 청년들의 이야기, 집안의 길흉사, 간절한 소원을 비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 그 속에 숨은 갈등과 화합의 이야기를 느티나무는 알고 있다.

이 책은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다. 나는 가까운 일본을 여행하면서 500년 이상 된 나무는 문화재로 특별 보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인도에서도 오래된 나무를 베어내는 벌목회사의 전기 톱 앞에서 여인네들이 나무를 끌어안고 ‘사람부터 베라’고 외쳐 나무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있다.

이 책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을 통해 필자는 느티나무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나무였으며 수 백년 된 나무들이 많은 수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됐다. 특히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한 마을이 자취 없이 사라진다는 대목에서 마을이 없어지는 것은 정신의 고향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마음의 황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빈자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나마, 이 책을 통해 앞으로 더 없어질지도 모를 느티나무의 자태와 한국 마을의 생활사가 글과 사진으로 복원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진 미학으로 재현해 낸 느티나무를 곁에 둔 저자의 글은 마치 느티나무 아래에서 듣는 나직하지만 또렷한 이야기와 같다. 글과 사진, 시와 산문, 글과 말의 경계를 넘는 이 조용하면서도 무게 있는 실험서를 대하는 기쁨은 크다. 우리 속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재와 과거를 이어 우리의 삶에 온기를 되찾아 준 저자에게 감사 드리고 싶다. 저자에게 말머리를 풀어 느티나무의 역사와 삶의 역사를 구술해 주었던 노인들마저 이제 떠나 버린다면?

이정옥 대구 가톨릭대 사회학 교수 jol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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