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죽림칠현의 통렬한 유교 뒤집기 ´성무애락론´

  • 입력 2002년 10월 4일 17시 15분


◇성무애락론/혜강지음 한흥섭 옮김/155쪽 4900원 책세상

죽림칠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혜강은 ‘은둔’이나 ‘청담’ 등으로 상징되는 ‘죽림칠현’이라는 일반적인 이미지 때문에 진면목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혜강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규범적 부조리에 대하여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지식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살았던 위·진 시대는 중국 최초의 제국이었던 한나라의 사상사적 유산인 경학(經學)적 세계관을 극복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로 등장하던 시기이다. 경학은 유학의 중심경전들을 헌법적 지위로까지 격상시키고 모든 규범적 해석의 궁극적 근거를 그로부터 연역해내던 한대 특유의 사상적 분위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따라서 경학적 사유의 특징은 개인의 삶을 기존의 규범적 질서 속으로 철저히 용해시켜 바라본다는 데 있다.

위·진 시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부과된 시대적 과제는 ‘명교’(名敎)라는 말로 흔히 지칭되는 그런 유학적 규범질서를 극복하고 개인을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새로운 질서의 원리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죽림칠현을 그린 중국화. 맨 오른쪽이 혜강이다. 중국 남경 서선교에서 출토됐다. 사진제공 책세상

‘성무애락론’은 자기 시대의 그와 같은 철학적 요청에 응답하고자 했던 혜강의 실존적 고뇌가 음악이라는 소재를 통해 훌륭하게 표출되어 있는 단편이다. 따라서 ‘성무애락론’에 담겨있는 이런 생각의 결을 온전히 독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단순히 음악론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진객(秦客)이라는 유학적 지식인과 혜강 자신을 상징하는 동야주인(東野主人)이라는 두 가공의 인물이 주고받은 모두 여덟 번에 걸친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단편을 통해서 혜강이 일차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예기’의 ‘악기’편에 잘 정리되어 있는 유학의 도구적 음악관이다. 유학적 시각에서 볼 때 흔히 ‘악’(樂)으로 통칭되는 음악은 ‘예’(禮)와 함께 예교적 규범 질서를 생산하고 유지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이른바 ‘교화’의 중요한 수단이다.

이런 까닭에 유학은 예와 악의 존재론적 근거를 강조하기 위해 그 연원을 우주론적 차원으로까지 소급시켜 이 세계의 본성 자체가 예와 악으로 표상되는 규범적 질서로 구축되어 있음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이런 시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이론적 작업의 첫 발은 세계 자체가 그런 의미로 채워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소리에는 인간의 감정(애락)이 내재해 있지 않다’고 하는 ‘성무애락론’의 주제의식이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것은 곧 “자연에는 어떠한 의미도 내재해 있지 않다”고 하는 탈 인간중심주의적 선언이며, 같은 맥락에서 명교로 표현되는 유학적 규범 질서 역시 근거가 없다는 폭로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철저하게 인간의 창조물이며 자연에게 있어 그것은 잉여일 뿐이라고 하는 이와 같은 생각은 당연히 “천지는 어질지 않다”(天地不仁)고 갈파한 노자 이래의 도가적 자연주의와 그 맥이 닿아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무애락론’이 혜강 당시에,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해방적 메시지는 명확하다.

원전 번역문보다 분량이 더 많은 옮긴이의 상세한 해설 또한 음악론에만 지면을 할애하지 않고 중국 고대의 이 조그마한 단편에 퇴적되어 있는 이런 사상사적인 지층들에 대해서도 적절히 짚어주고 있어 읽어 나가는 데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

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hundun@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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