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0억 주고 남북정상회담 했나”

  • 입력 2002년 9월 25일 23시 05분


엄호성의원
엄호성의원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대출해 준 4900억원이 실제론 현대아산을 통해 북한에 ‘은밀히’ 건네졌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25일 국회 정무위의 금융감독위원회에 대한 국정감사에 출석한 증인들의 입을 통해 이를 방증하는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그동안 설(說)로만 나돌았던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대북 이면 거래 의혹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날 국감에서 증인으로 나온 엄낙용(嚴洛鎔) 전 산은 총재의 진술은 이 같은 의혹의 개연성을 높여줬다. 은행의 최고 책임자가 현대상선이 문제의 돈을 갚지 못하겠다고 버텼다는 사실과 이 같은 내용을 청와대와 정부, 국가정보원 핵심 인사들에게 보고했다고 한 증언은 가볍게 넘기지 못할 내용이다.

엄 전총재가 2000년 8월 청와대 별관 회동에서 이기호(李起浩) 당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게 ‘김충식(金忠植) 현대상선 사장이 대출금을 갚지 못하겠다’고 버틴다는 사실을 전하자 “알았다.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이나, 그가 임동원(林東源) 당시 국정원장과 이 문제를 상의하려 했고, 대북문제를 관할하는 김보현(金保鉉) 국정원 3차장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는 증언은 앞으로 큰 논쟁을 불러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이날 ‘대북 이면 거래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 엄호성(嚴虎聲) 의원은 “산은 총재가 국정원 대북문제 책임자를 왜 만나느냐”고 따졌다. 현대상선이 자회사인 현대아산을 통해 금강산사업을 추진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4900억원 대출 과정에 당시 한광옥(韓光玉) 대통령비서실장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당시 산은 총재였던 이근영(李瑾榮) 금감위원장은 “한 실장으로부터 (대출해 주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남북정상회담을 둘러싼 대북 지원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 왔으나 구체적인 물증이 드러나진 않았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3월 5일 의회에 제출한 ‘한미관계 보고서’에서 ‘현대가 금강산관광 사업을 위해 북한에 제공한 4억달러가 넘는 거액을 북한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을 때도 정부는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한나라당은 엄 전 총재의 증언으로 문제의 4900억원을 실제 사용한 주체는 현대상선이 아니라 현 정권이며, 대북 이면거래가 명백히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이 돈이 남북정상회담의 대가일 공산이 크다고 보고 햇볕정책의 이면거래 의혹에 대한 총공세를 준비중이다. 정형근(鄭亨根) 의원은 이날 국감에서 “6·15정상회담이 하루 연기된 것은 돈 전달이 늦어지면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26일 국감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폭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한나라당의 이 같은 공세는 대북 지원에 앞장선 현대의 도덕성을 문제삼아 현대 출신인 무소속 정몽준(鄭夢準) 의원에게 타격을 입히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