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보니]전수진/물난리와 독일 사람들

  • 입력 2002년 8월 27일 18시 20분


필자는 30년 넘게 독일에 살고 있지만 이렇게 큰 물난리를 경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번 홍수는 엘베강이 150년 만에 범람한 유례가 드문 참변이다. 20명이 숨지고 이재민은 3만명이 넘으며 재산피해 규모가 약 150억유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등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맞은 최대 최악의 위기다.

지난 2주 동안 텔레비전 화면은 온통 가슴 조이는 장면들로 가득 찼다. 노아의 홍수를 연상시키는 수마는 강둑을 사정없이 무너뜨렸고 집들은 상자로 만든 장난감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180여개의 다리는 무너지거나 사용불능 상태에 빠졌다.

총 1300㎞에 이르는 도로와 철로가 파손되었다. 목가적이고 평화롭던 전원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은 순식간에 죽음의 물바다로 돌변했다. 전기도 전화도 없이 외부세계와 완전 차단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재민들은 물난리 중 마실 물이 없어 생존의 위협 앞에 벌벌 떨었다.

지금 독일에서는 이런 끔찍한 재난이 인재(人災)인지, 천재(天災)인지를 규명하자는 논쟁이 활발해지고 있다.

전후 경제기적의 대명사인 라인강의 경우 프랑스와 접경지역인 상류는 이미 1985년부터 수로를 거의 일직선이 되도록 고쳤다. 그 결과 홍수저장고 역할을 하던 강변의 푸른 초지는 점차 사라졌다. 이 때문에 큰비가 오거나 알프스 빙설이 갑자기 녹으면 홍수는 주기적으로 일어난다.

엘베강도 이런 변화를 겪기는 통독 전 서독과 다를 바 없었다. 구 동독정권은 노동자 농민을 위한답시고 제방을 높이 쌓고 초지를 몽땅 농지로, 택지로 만들었다. 엘베강의 지류는 온통 콘크리트로 싸 발라져 하천은 하수도로 둔갑했다. 게다가 분할 전 체코슬로바키아는 엘베강 상류에다가 내륙 수운의 활로를 틀 겸 홍수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자그마치 22개의 수문을 만들어 놓았다. 집중호우로 인해 수문은 활짝 열렸고 급류는 자연법칙에 따라 오갈 데 없어 좁은 강폭을 압박했다. 당연히 수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물난리의 주범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방조했다는 혐의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이번 홍수는 우리가 독일을 보면서 무조건 모방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는 점을 냉철하게 경고해 준다. 그래서 나는 독일인들이 시행착오를 깊게 반성하는 자세를 보면서 고국이 당면한 각종 문제점이 산업화 과정에서 겪는 불가피한 진통이라고 자위하는 부류에게 동조해서는 안 되겠다고 각성하고 있다. 기상이변과 천재지변에 관한 연구와 논란이 한창 진행 중이지만 분명한 결론이 내려져 차라리 ‘내가 지나치게 과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홍수와의 전쟁이 곧 선거전이 된 독일의 현실을 보면 기막힌 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위기의 시대는 영웅을 배출한다. 이번 수난 극복에 이바지한 영웅은 살신성인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래주머니를 채운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다. 위기를 잘 관리했다고 총리에게 영웅칭호를 붙여주지 않는 것이 지금의 독일인이다.

전수진 한독전문번역 ´전서비스´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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