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청년실업은 축복이다

  • 입력 2002년 8월 21일 18시 32분


“이 선생, 걱정 마시오. 한국은 다시 일어납니다. 오히려 절호의 기회가 온 겁니다. 부실기업이 정리되고 대기업만 바라보던 젊은이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그들의 겁 없는 도전과 역동성이 한국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을 겁니다. 축하합니다.”

지난 경제위기 때 일본의 와다(和田) 교수가 늘어진 내 어깨를 두드리며 한 말이다. 우리 연구소 해외자문 교수인 그는 일본사회의 정신병리를 예리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마다 여름이면 한 무리의 사람을 이끌고 한국에 쇼핑을 왔다 간다. 처음엔 인사동을 좋아하더니 요즘은 “쯧쯧”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가 즐겨 찾는 곳은 동대문이다. 아주 감탄을 한다. “이 거대한 쇼핑몰이 24시간 돌아가다니….”

▼위기를 기회로 바꾼 ´동대문´▼

가게주인 부부 대부분이 학사출신에 4개 국어를 한다. 세계의 패션정보를 꿰뚫어 보고 끊임없이 새 상품을 내 놓는다. 값도 싸고 빠르고 고객 취향대로 맞춤서비스를 한다.

“이 선생, 지구상에 이런 곳을 본 적이 있나요? 누가 여길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어 보이며 의아해하는 나를 쳐다본다.

동대문이 재래시장에서 오늘의 첨단패션몰로 본격적으로 변신 도약할 수 있었던 건 ‘젊은 브레인들’이 대거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축복이지요. 경제위기 때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그들의 지적 창의성과 과감한 도전이 오늘의 동대문타운을 만든 겁니다.”

우리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건 청년실업이었다. 희망에 부풀어 대학 문을 나서지만 기업의 취업문은 굳게 닫혀 있다. 구조조정으로 쫓겨난 선배, 계속 대학에서 쏟아져 나오는 후배, 이러다간 유성처럼 아주 사라져 가는 건 아닌가. 참으로 암담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닫힌 기업만 바라보고 있을 게 아니었다. 취업이 안 되면 스스로 해 볼 수밖에 없었다.

소규모 벤처사업이 폭발적으로 생겨난 데에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정보기술(IT)산업은 이제 세계 첨단을 지향하고 있다. 서울벤처밸리는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것이 침체된 우리 산업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여기만이 아니다. 젊은 인재들은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고 있다. 패션몰 만인가. 식당산업도 젊은 브레인들이 몰려들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내용에서 장식 경영에 이르기까지 아주 세련되어졌다. 세계에 내놓아도 자랑스럽다. 김치와 비빔밥이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고 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셔도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맛도 좋고. 이게 문화입니다.” 디자이너 이명희씨는 문화를 이렇게 쉽게 정의했다. 그렇다. 이들 젊은이는 문화라는 것을 우리 생활 속에 자연스레 끌어들인 화려한 세대다.

영화 음악 무용 전통적인 문화산업에도 가히 혁명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다. 동남아를 휩쓸던 한류(韓流) 열풍은 이제 세계를 향해 무섭게 뻗어 가고 있다.

세계를 감동케 한 ‘붉은 악마’의 열풍도 10명 정도에 불과한 30대 초반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열정이 만들어낸 기막힌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참으로 절묘한 틈새시장을 파고들어 그 기막힌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렇게 해서 대기업 일변도의 우리 사회 산업 부문에도 균형이 잡혀가고 있다. 축구 스타만이 아니다. 유학 이민 취업 연수…. 겁도 없이 해외로 달려가고 있다. 이 모든 분야의 본격적인 변화가 불과 요 몇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부모 세대가 이들 젊은이의 소규모 창업을 지원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긴 것도 참으로 다행이요 축복이다.

▼아이디어 열정으로 미래 개척을▼

막상 당했을 땐 앞이 캄캄했지만 우리가 겪은 그 위기는 하나의 기회요 축복이었다. 우리의 고도성장은 거품이었다. 부실한 기초 위에 고층빌딩이 올라간 것이다. 더 치명상을 입기 전 적절한 시기에 잘 무너졌다. 회복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을 때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축복은 우리 젊은이들의 의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만이 출세의 길이라는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요즈음도 신문 지상에 상대적으로 높은 청년실업을 걱정하는 소리가 많다. 당장은 괴롭다. 하지만 잘 보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궁즉통(窮卽通)’, 정말 답답하고 궁해야 잘 보이게 마련이다. 청년실업은 축복이다.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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