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기 세상읽기]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보고있나

  • 입력 2002년 8월 16일 17시 51분


광복절을 맞으면, 우리는 근대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 애쓴다. 올바른 교훈을 얻으려면, 물론 당시 사회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개항 뒤의 우리 사회의 모습과 우리 선조들의 생각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빠르게 바뀌는 현대에서 한 세기는 긴 시간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관점을 과거에 투사해서 역사를 재발명한다. 개항 뒤의 역사에선 이 문제가 특히 심각하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민족주의적 정서와 관점을 당시 상황에 투사한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주의는 식민지 시대에 다듬어진 것으로, 한 세기 전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지녔다고 여기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르다.

그런 민족주의적 편향은 우리 전통 사회의 지나친 미화와 일본의 행위에 대한 비합리적 폄하로 나타났다. 이 점은 갑오경장에 대한 평가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우리 전통 사회의 두드러진 특질들 가운데 하나는 노예 제도였다. 노비라고 불린 세습 노예들이 무척 많았을 뿐 아니라 지배 계급과 통치 조직이 노예 노동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는 단순한 노예소유 사회(slave-owning society)를 넘어 진정한 노예 사회(slave society)였다. 그래서 가장 완전한 노예 사회로 꼽히는 남북 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 사회처럼, 노예들이 가족을 이루는 것을 거부했다.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이 제 계집종을 얻어 낳은 자식은 자기를 소유한 관아나 주인에게 주고, 제 아내의 계집종을 얻어 낳은 자식은 아내를 소유한 관아나 주인에게 준다. 양인인 여자를 얻고 다시 그 양처의 계집종을 얻어 낳은 자식은 자기를 소유한 관아나 주인에게 준다. 만일 그 양처가 다른 남편에게서 자식을 낳았다면, 그 자식에게 준다. ‘경국대전’의 천취비산(賤取婢産) 조에 나온 이 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합리적’이다. 노비는 인간이 아니라 가축처럼 주인의 재산이라는 전제를 한번 받아들이면. 비록 조선조 후기에 노예 제도의 외형은 많이 느슨해졌지만, 그 정신은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따라서 다른 개혁 조치들이 없었더라도, 노비 제도를 완전히 없앤 갑오경장은 조선조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우리의 평가는 인색했다. 갑오경장은 한국의 제도, 경제, 사회면의 근대화를 위한 발단이기는 하였으나,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일본의 압력에 의하여, 일본의 이익을 포함하여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는 한 국사사전의 평가는 대표적이다.

위의 평가는 겹으로 그르다. 먼저, 갑오경장은 성공한 혁명이었다. 그것은 우리 전통 사회의 낙후된 제도들과 풍습들을 단숨에 허물어서 근대적 제도들과 풍습들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 진화가 일본의 야만적 식민 통치 때문에 막히고 뒤틀렸다는 사실을 들어서, 갑오경장의 성과를 깎아 내리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다음엔, 갑오경장은 일본의 압력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 덕분에 성공했다. 어떤 사회에서나 근본적 개혁들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들의 저항으로 거의 모두 실패한다. 만일 일본의 무력이 떠받치지 않았다면, 양반 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존립 기반을 허문 조치들이 가능했을까?

근년에는 민중주의적 편향까지 겹쳤다. 동학란의 명칭이 여러 번 바뀐 데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민중 반란은 원래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데다, 일본군과 처절하게 싸웠으므로, 동학란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동학란은 이룬 것이 거의 없고 그저 일본이 조선을 무력 점령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일은 지나친 낭만화다. 동학군 지도부는 소수 종교에 바탕을 둔 신정(theocracy)을 폈고, 총탄을 막아낸다는 부적들을 나눠주고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적군 진지로 병사들을 내몰았다. 그런 세력이 과연 조선조의 대안이 될 수 있었을까? 중국의 태평천국은 동학란과 본질과 외형이 아주 비슷한데, 나라를 실제로 세워 13년 동안 존속했다. 그러나 아무도 태평천국이 청조(淸朝)의 대안이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우리 사서들을 통해서는 일반 시민들이 우리 전통 사회의 모습과 선조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현실적으로는, 조선조 말기에 이 땅을 찾은 외국인들의 저서들이 오히려 낫다. 특히 프레데릭 아서 먹켄지의 ‘조선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1908)은 추천할 만하다. 영국 신문의 특파원으로 취재했던 터라, 그는 일본군의 만행들을 상세히 기술했고 (우리 사서들에 나오는 1904년의 의병 활동과 일본군의 만행에 관한 사진들은 거의 다 먹켄지가 찍은 것들이다), 조선 사회의 모습을 잘 그렸고, 조선 정부가 안은 문제들과 조선의 주권 상실 과정을 객관적으로 분석했다.

“‘왜 내가 더 많은 작물들을 심고 더 많은 땅을 경작하지 않느냐구요?’ 라고 한번은 조선 농부가 내게 물었다. ‘왜 내가 그래야 합니까? 더 많은 작물들은 수령들이 더 많이 빼앗아간다는 것을 뜻하는데요.’”

조선 정부의 근본적 문제들을 설명하면서 그가 언급한 이 일화는 지금도 우리 모두의 가슴에 아프게 닿을 것이다.

복거일 소설가·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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