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8월의 저편' 유미리씨 "삶도 마라톤도 고통의 질주죠"

  • 입력 2002년 8월 16일 17시 44분


작가 유미리는 “두돌반 짜리 아들이 수시로 바깥에 나가자고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집 근처에 있는 절까지 자주 산책하러 온다”고 말했다.(가마쿠라〓이영이특파원)
작가 유미리는 “두돌반 짜리 아들이 수시로 바깥에 나가자고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집 근처에 있는 절까지 자주 산책하러 온다”고 말했다.(가마쿠라〓이영이특파원)
동아일보와 일본 아사히신문이 공동연재하는 재일작가 유미리(柳美里)씨의 장편소설 ‘8월의 저편’이 17일로 100회를 맞았다. 계절도 마침 소설 제목처럼 8월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 낮기온이 35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여름날 작가를 만났다.

도쿄(東京)에서 서남쪽으로 전철로 1시간 남짓 걸리는 고도(古都) 가마쿠라(鎌倉). 유씨와 만나기로 한 역 앞의 낡은 커피점은 여름휴가로 휴점이었다. 그는 잠시 낭패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근처 세련된 분위기의 카페로 발길을 옮겼다.

집에서 서둘러 나온 듯한 그에게 “많이 바쁜 것 같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두 돌 반짜리 아기 키우고 소설 쓰고 달리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못한다”며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 애쓰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바쁜 그를 오래 붙잡을 수 없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연재소설이 100회를 맞았다. 소감은….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 쓸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 한국 전통이나 생활습관을 전혀 모르지 않는가. 1925년 상황은 더욱 그렇다. 마치 프랑스 소설을 쓰는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쓰기 시작하니 등장인물들이 서서히 움직여주기 시작했다. 장면들이 또렷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태어나기 전부터 갖고 있던 기억이라고 할까. ‘지(知)의 시냇물’이 도와주는 것 같다.”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는 얘기같다.

“연재를 시작할 때 420회를 약속했다. 마라톤의 42.195km를 의식한 횟수다. 100회는 10km 지점에 해당한다. 마라톤에서는 20∼30km지점이 가장 고통스럽다. 이제부터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등장인물과 만나는 것이 즐겁다.”

-전혀 경험이 없는 세계를 묘사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일제시대 수업장면 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에 근접해 정확하게 살려내지 않으면 조선의 아픔이나 슬픔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수업을 받았거나 가르쳤던 사람들을 만나 학교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취재했다. 밀양지방 풍습이나 민요 등을 알아보기 위해 자료를 쌓아놓고 공부하고 있다. 출산(出産)의식 같은 것은 지방마다 달라 특히 어려웠다.”

그는 소설을 시작하기 직전인 3월 서울서 열린 동아마라톤에 참가, 풀코스를 완주했다. 당시 체험은 ‘8월의 저편’ 도입부에 생생히 묘사됐다. 한국서 취재를 겸해 벌였던 굿판 역시 소설 속 무당장면으로 다시 살아났다.

-소설 도입부에서는 때로는 내면의 목소리를 바로 전달하는 듯한, 때로는 희곡의 기법을 빌린 듯한 새로운 화법을 시도했는데….

“문체로 시험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뛰는 장면에서는 호흡 때문에 생각이 단절되는 것을 느꼈다. ‘큐큐파파’(뛰면서 호흡을 조절하는 소리) 같은 의성어를 쓰지 않으면 전달이 어려웠다. 굿의 경우 일종의 연극 같았다. 각자 대사를 말하는 장면을 제3자가 설명하는 식이 되면 리얼리티가 떨어져 꾸며낸 얘기 같아진다. 그래서 연극과 같은 텍스트가 됐다.”

-이 소설에서는 ‘유미리’라는 실명이 그대로 등장한다. 작가이자 주인공 중 한 명으로서 ‘객관화’의 어려움은 없는지 궁금하다.

“미리(美里)라는 이름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요한 ‘열쇠’다. 소설의 배경인 밀양의 옛이름 ‘미리벌’이다. 내 이름을 지어준 외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내 이름의 뜻을 말해주지 않았다. 내 이름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작업을 테마로 하고 싶었다. 요즘에야 깨닫지만 이 소설은 이름에 얽힌 이야기다.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것, 즉 창씨개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가. 주인공 우철도 힘들 때마다 죽은 동생의 이름을 부른다.”

그는 전날 달리다가 넘어졌다며 벌겋게 상처난 오른쪽 무릎을 내보였다.

“앞으로 등장인물들이 점점 가혹한 처지에 몰리게 된다. 동생이 사살당하고 주인공이 투옥되고 나라상황도 힘들어진다. 내 자신이 고통스럽지 않으면 독자에게 고통을 전달할 수 없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한국말을 배울 계획이다. 우선 다음 달 부터 주 1회 정도로 시작하고 시간이 되는 대로 공부시간을 늘려가겠다. 태어나면서부터 잃어버렸던 말을 되찾는 작업이다. 내년 동아마라톤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다음에는 4시간 가깝게 기록을 줄여보겠다. 이번 소설이 끝나면 아버지쪽 뿌리를 더듬는 작품을 쓰고 싶다. 어머니 아버지 양쪽 뿌리를 다 찾아야 역사의 양 날개를 갖출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아직도 일주일에 두 번씩 달린다. 올 봄 동아마라톤 출전이전 보다 연습코스를 10km 늘려 30km를 뛴다. 그것도 오르막이 있는 산길을 넣어 더 힘든 코스로 만들었다.

“마라톤에서 10km, 20km지점에서 몸 상태가 어떻고 주변 풍경이 어떻게 보일지는 직접 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200회, 300회 때 등장인물이 어떻게 보일지는 아직 모른다. 달리기처럼 그저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계속 달리고 있는 것일까.

가마쿠라(일본)〓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지금까지의 줄거리▼

소설이 시작되면 마라토너였던 이우철의 혼이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 우철은 좌익운동에 가담했다가 살해당한 남동생 우근을 생각하고,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자문한다.

우철의 외손녀인 유미리는 밀양에서 굿을 벌여 우철의 혼을 불러낸다. 우철은 무당의 입을 빌어 나타난다. 그는 첩이 낳은 아들 신철에게 사과의 말을 한다. 무당이 죽은 자의 혼을 잇따라 불러낸다. 우철의 첫 부인 인혜는 장남의 요절을 한탄하고, 두 번째 부인 정희는 손녀 유미리에게 일어난 불행에 동정을 보낸다. 과거 우근을 사랑했지만 정신대에 끌려가고 만 한 소녀의 혼이 끼어든다. 미리는 ‘일가족의 가라앉은 혼을 끌어올리리라’고 약속한다.

굿을 끝낸 미리는 서울에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지만 무릎에 심한 통증을 느낀다. 포기하려는 유혹을 느끼지만 할아버지 우철의 목소리가 그를 격려하며 인도해 완주를 이룬다.

1925년, 열두 살의 소년 우철은 남동생의 탄생을 맞는다. 우철의 아버지 용하는 갓난아기의 관상을 길하다고 점치나, 엄마 희향은 우철에게 ‘거짓말이다’라고 말한다.

남동생이 태어난 다음 날, 우철은 소학교에 등교한다. 수신시간에 ‘교육칙어’를 봉독하면서 자기 목소리가 아픔처럼 울리는 것을 느낀다. 쉬는 시간, 친구 우홍은 우철에게 항일 투쟁가 김원봉의 기사를 보여주면서, 언젠가 의열단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아들이 태어나는 와중에도 용하는 같은 마을의 여인 미령의 집에 수시로 드나든다. 용하는 갓난아이의 이름을 우근이라고 짓는다. 초이렛날을 맞아 희향은 삼신할매에게 우근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떠올리고 슬픔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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