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논설위원칼럼]김장권/˝대충 넘어가자고요?˝

  • 입력 2002년 7월 11일 18시 38분


6월, 그 신바람 나던 흥분과 환희의 계절이 가고 다시 정치의 계절이 왔다. 국회가 개원되었고 곧장 재·보선 선거가 치러질 것이며, 무엇보다 대선 고지를 향한 마지막 한판 승부가 남아 있다. 정치학자들이라면 그런대로 이런 상황이 재미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정치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짜증이 날 정도다.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하는 정치면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아마 내일도 마치 ‘강 건너 불’ 같은 수억원대의 정치적 비리 사건으로 우리의 눈을 어지럽힐 것이다.

정치가 정말 ‘강 건너 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발등의 불’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정치권의 검은돈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낸 세금이고 앞으로도 우리 지갑에서 나갈 돈들이다. 정치가들이 결정 한번 잘못하면 내 직업도, 가정도 날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얼마 전 외환위기 사태로 절감했다.

▼책임정치의 기본은 신상필벌▼

내 발등의 불이라면 당연히 내가 꺼야 되지 않겠는가. 이 불을 끄는 방법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다. 압박의 원리, 또는 당근과 채찍 원리의 실천이다. 사실 정치권의 고위 인사들이나 관료들은 우리가 세금으로 고용한 공복에 불과하다. 다만 우리는 오랫동안 권위주의 정치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피고용자를 제대로 관리하려면 고용계약에 의거해 공과와 책임을 철저하게 따져 때로는 벌(채찍)을 주고 때로는 상(당근)을 주면 된다. 이 간단한 행동 원리가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이다. 이미 200여년 전에 미국의 독립혁명가 토머스 제퍼슨이 갈파했듯이 민주주의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 불신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정이 깊고 의리를 존중하며 살아온 민족으로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인간관계를 맺어 왔다. 인간관계를 냉정한 계약관계로 보고 이를 당근과 채찍으로 관리한다는 개념에는 본질적으로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냉정한 계약 원리를 기초로 한 현대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인간적으로 용서하고 덮어두면, 용서받은 사람이 스스로 뉘우치며 행동을 조심하는 소규모의 공동체 원리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의 틀 속에서 섣부른 용서나 화합은, 그것을 노려 자기 이익을 챙기고 다수의 이익을 저버릴 무리들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 되기 쉽다. 냉엄한 단죄와 응징 없이는 민주주의가 결코 발전할 수 없다.

이를테면 최근 서해교전 사태의 경우, 누가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정확히 따져 철저하게 징계하도록 시민으로서 압박을 가해야 한다. 국민의 생사가 걸린 이런 문제를 대충 넘어가자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런 사람부터 엄중 징계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정치적 비리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에 만약 청와대가 개입하려 했다면 이 경우도 철저히 진상을 가려 처리하도록 국민적 압력을 가해야 한다. 특히 국민의 신성한 주권 행사를 더럽힌 선거사범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사와 처벌이 이루어지도록 압박해야 한다. 흐릿하게 과거 속으로 묻혀 가는 여러 비리 사건에 대해서도 민주시민으로서 절대 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줘야 한다.

이러한 자세를 몸에 배게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머리로는 되지만 몸으로 안 되는 일들이 많은데 바로 이 경우가 그렇다. 인간은 몸이 원하는 것을 더 따르기 마련이고 특히 우리 민족은 몸의 신바람에 장단을 맞추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로 그 신바람에 6월 한 달을 보내온 우리가 전혀 주파수가 다른 당근과 채찍이란 새 장단에 적응할 수 있을까.

▼서해교전 등 엄중징계해야▼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난 한 달간 우리가 맞추었던 장단도 감성에 기초한 몸의 장단만은 아니지 않았던가. 거스 히딩크 감독의 전략과 조련법은 고도의 합리적 계산과 철저한 당근-채찍 논리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히딩크에 대해 초기에 엄청난 반발이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능력 위주의 냉정한 대표선수 선발방식 때문이었음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6월의 환희와 감동, 그리고 신바람도 사실은 엄정한 이성적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감성으로서의 애국심이 아니라 이성으로서의 애국심이 필요한 때다. ‘붉은 악마’에서 표출된 감성적 에너지는 우리 민족의 큰 재산이다. 그러나 재산 관리는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해야 한다. 감성적 에너지조차 이성적 에너지와 결합되어야만 폭발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6월의 뜨거운 함성에 담겨 있던 힘을 이제 한 단계 성숙시켜 대한민국을 축구 강국만이 아닌 민주주의 정치 강국으로도 성장시키는 데 실어보자.

김장권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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