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재호/젊은 그대, 월드컵을 기억하라

  • 입력 2002년 6월 23일 18시 57분


우리 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88서울올림픽을 생각했다. 차이고 넘어지고 부서지면서도 끝내 해낸 그들의 얼굴에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들도 사력을 다했었다.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딛고 남자보다 더 힘든 강훈 끝에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우리 모두는 함께 울었다. 그들의 갈라터진 손을 보고 울었다. 어디 그들뿐이었으랴.

그랬다. 88올림픽 때도 우린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에 감동하고 전율했다. 손님 대접과 경기운영에 한치의 빈틈도 없어 “가장 성공적인 올림픽”이라는 찬사를 들었고, 금메달까지 연일 쏟아져 분출하는 국민적 에너지와 자긍심으로 가슴은 터질 듯했다.

그런데 정말로 기이하게도 그 빛났던 올림픽이 너무 쉽게 우리들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분단국에서 처음 열려 인류의 평화와 화합의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는 올림픽, 한국에 메달 종합순위 일약 4위를 안겨준 올림픽이 성화가 꺼지자 곧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박세직(朴世直)씨는 6년 뒤인 94년 ‘서울올림픽의 묻혀진 이야기’란 책에서 “그 기적 같았던 올림픽이 왜 그토록 빨리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야만 했는지 의문을 풀어야 한다”고 했지만 정말 왜 그렇게 된 것일까.

‘냄비 근성’ 때문으로 볼 수도 있고, “정부 주도로 치러져,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의 자발적 참여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약했던 것이 아니었나”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포츠를 우민화(愚民化)의 도구쯤으로 보는 사람에겐 망각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비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5공비리 청문회라고 할 수 있다. 10월 2일 올림픽이 끝나고 한달 만에 시작된 청문회는 우리로 하여금 올림픽의 의의를 되새겨 보고 영원한 국가적 자산으로 가꿔 나가게 할 최초의 동력을 앗아가 버렸다. 우리는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한 청문회 실황중계에 푹 빠져버렸던 것이다.

이어 벌어진 여소야대의 피 튀기는 정쟁(政爭) 속에서 서울올림픽은 올림픽 기념공원의 몇 점 조형물에서나 겨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전 정권의 비리가 청문회를 불렀고, 그 청문회가 올림픽을 망각 속에 밀어 넣었으니 이 또한 기막힌 업보이기도 했다.

이제 정말 조심스럽게 월드컵 얘기를 해보자. 월드컵도 그런 운명을 밟을 것인가. 솔직히 우려와 희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불행히도 월드컵이 끝나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8월 재·보선이다. 5공 청문회가 한달 만에 열렸듯이 한달여 만에 최대 13곳에서 재·보선이 벌어진다. 단순히 빈 의석을 메우는 선거가 아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여야가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나오는 재·보선이다.

월드컵을 통해 확인했던 국민적 일체감, 신바람, 자긍심이 과연 선거라는 격랑과 탁류의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이어 닥칠 대선은…. 정부는 이성적인 선거, 차분한 선거를 주문하겠지만 이 정권의 비정(秕政)과 실정 또한 확연하니 애당초 무리일 터이다. 이 역시 업보인가.

그렇다고 희망까지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서울시청 앞에서, 세종로 사거리에서,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물결쳤던 수백만 젊은 그들에게 기대한다.

그들이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을 때 계층을, 색깔을, 지역을, 정당을, 출신학교를 따졌는가. 아니다. 풋풋한 젊음 사이에서 발견한 것은 순수요, 이성이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가리켜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최초의 NGO”라고 했는데 신선하게 들렸다.

젊은 그들이 있기에 아마 월드컵은 88올림픽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열심히 응원한 당신, 이제 월드컵을 보호하라.

이재호 국제부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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