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노무현의 고민

  • 입력 2002년 6월 16일 22시 46분


‘DJ와의 차별화’는 이제 민주당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6·13지방선거 결과가 참패로 드러난 후 노 후보 진영은 “이제는 호남이 반발하건, 청와대가 섭섭해하건 DJ를 밟고 넘어갈 수밖에 없게 됐다”는 차별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노 후보 진영의 이런 절박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짐작할 만하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결과가 노 후보가 내걸었던 ‘동서화합’이란 명분과는 거꾸로 ‘호남고립구도’로 결말지어졌기 때문이다. 정치적 수사(修辭)를 빼면 ‘민주당〓DJ당〓호남당’이란 유권자들의 인식이 ‘부패정권 심판론’과 맞물려 투표행태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정치의 한 패턴으로 정착돼가는 듯한 여당 대통령후보의 현직 대통령과의 ‘진짜 차별화’가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과제라는 점이다. 실제 말만 차별화지 ‘현직 대통령 때리기’의 양상으로 진행돼온 최근 경험을 통해 차별화가 후보라는 상품의 재포장을 위한 ‘정치 쇼’로 국민에게 인식돼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97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경우 ‘YS와의 차별화’ 전략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대선과정에서 이 후보 지지자들이 YS를 상징하는 ‘03 마스코트’를 몽둥이로 두들기는 장면까지 연출하며 YS와의 절연(絶緣)을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선 패배 이후까지 한나라당에는 ‘나라 망친 당’이란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PK지역의 역풍도 거셌지만, 유권자들의 표의 심판의 바탕에는 포장만 바꾼 한나라당과 이 후보를 향해 ‘국가부도의 위기가 닥치도록 당신들은 무엇을 했느냐’는 추궁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요는 차별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정치적 카드로서의 ‘차별화’가 갖는 효용성은 쉽게 추량(推量)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노 후보 자신은 이미 이런 차별화의 허구성을 깊이 꿰뚫어본 듯하다. 그가 작년 말부터 여러 자리에서 ‘DJ정권의 승계’를 강조하면서 “모양만 갖추는 억지 차별화는 국민을 속이는 것이며 진정한 차별화는 노선과 이념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거듭 밝혀온 것이 그 예다.

그러나 ‘할 말을 하는 것’과 ‘이념의 승계’는 분명히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실제 노 후보가 작년 재작년 잇달아 민주당에 불어닥쳤던 ‘정풍파동’의 회오리 때 침묵을 지킨 일이나 ‘홍(弘)3 게이트’의 와중에서도 ‘인간적 도리’를 강조하는 듯한 처신을 한 것을 놓고도 “정치적 계산이 깔린 행보가 아니냐”는 지적이 민주당 내에서도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더욱이 경선에서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이후에도 아직 노 후보가 말한 ‘진정한 차별화’의 행보는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노 후보 진영의 한 관계자는 “각계 원로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행보를 통해 ‘DJ당의 인적구조’를 벗어나려는 절실한 몸부림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개혁의 기치를 확실히 들지도 못하면서 YS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바람에 정체성의 혼란만 생겼다”고 실토했다. 실제 그의 개혁 프로그램 마련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당내 문제만 해도 경선에서 중도 하차한 ‘이인제(李仁濟) 끌어안기’를 위한 노력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고 보면 특히 영남 등지에서 그를 DJ당에 얹혀 ‘무임승차(無賃乘車)’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시각을 갖고 있는 것도 무리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는 느낌이다.

민주당 일각에서조차 고향인 부산 유권자들을 향해 “DJ 미운 줄만 알았지 노무현 귀한 줄 모른다”고 섭섭함을 토로하기에 앞서 ‘진정한 차별화’의 그림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동관 정치부 차장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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