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문홍/명예국적

  • 입력 2002년 6월 16일 22시 46분


1653년 8월16일, 난파된 서양배 한 척이 제주도에 닿았다. 일본으로 향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배였다. 병자호란 이후 북벌정책을 추진했던 당시 효종 임금은 이들한테서 신무기 제조기술을 전수 받아 청나라 정벌의 꿈을 실현하기를 원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래서 표류 당시 22세 청년 헨드릭 하멜 등은 1666년 일본으로 탈출하기까지 무려 13년 동안이나 조선에 ‘억류’돼 살아야 했다. 이후 고국에 귀환한 하멜이 쓴 표류기가 ‘코리아’를 서양에 알린 최초의 책이 됐음은 널리 알려진 대로다.

▷우연인가. 우리 축구대표팀의 월드컵 16강 진출 염원을 실현시켜 요즘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거스 히딩크 감독도 네덜란드 사람이다. 하멜이 한국을 서양에 처음 알렸다면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의 매서운 맛을 세계에 각인시켰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렇게 보면 네덜란드와 우리의 인연은 참으로 긴 셈이다. 하멜과 히딩크 감독 간에는 물론 다른 점이 더 많다. 하멜 일행을 통해 북벌(北伐)을 꿈꾼 효종의 희망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히딩크 감독을 영입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는 점, 하멜 일행이 이 땅에 강제로 ‘억류’됐다면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한국에 왔다는 점 등이 그렇다.

▷요즘 히딩크 감독을 우리나라에 귀화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는가 하면 그에게 ‘명예국적’을 부여하자는 말도 나온다. 외국인에게 명예국적을 준 전례도 없을 뿐더러 그러기 위해선 규정을 새로 마련해야 할 판이니 일이 어떻게 될지는 더 두고봐야 하겠으나 이 또한 히딩크 감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의 표현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러나 하멜 일행이 이 땅에서 13년을 살다가 결국은 돌아갔듯이 월드컵 이후 히딩크 감독의 거취도 그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닐까.

▷한 가지, 우리나라와 히딩크 감독은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는 점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한국민이 원하는 16강이 나의 바람은 아니다. 내게는 그 이상의 바람이 있다. 만약 6월을 끝으로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될지라도 한국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는 한국팀 감독이고 앞으로도 (월드컵 마지막 날까지) 한국팀 감독이라는 것이다. 월드컵에서 우리는 분명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널리 읽혀져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는, 그의 타임지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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