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30초짜리 인생' 공허한 뒤안길 '장밋빛 인생'

  • 입력 2002년 6월 7일 17시 52분


장밋빛 인생/정미경 지음/261쪽 8500원 민음사

광고는 우리 시대의 압도적인 주술이며, 인간 부족의 새로운 신화에 속한다. ‘장밋빛 인생’에는 ‘광고장이’들이 등장한다. 눈치가 너무 빠른 독자들은, 이 소설이 기호로서의 사물의 상징 가치가 물신적인 힘을 발휘하는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과 실험적인 미학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할 듯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미덕은 보다 고전적인 영역에서 시작된다.

우선은 광고 제작이라는 직업에 대한 박진감 있는 묘사이다. 직접적인 경험에 바탕 한 듯한 현실감 넘치는 기술들은, 피를 말리는 광고 제작의 전쟁터 한 가운데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1990년대 소설 특히, 여성 작가들의 소설에서 직업적인 생산과 노동의 공간은 문학적인 조명을 거의 받지 못한 바 있다. 속도전이 지배하는 광고제작의 현장성은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영역이며, 이 작품이 성취한 서사적 긴장의 중심을 이룬다.

그 사이로, 작가는 고립된 개인의 실존적인 자의식을 부각시킨다. 서술자인 1인칭 주인공은 젊은 날 광고에 미쳐 명성을 얻었고, 이제는 일과 사랑 모두에서 환멸의 시간을 맞이한다.

‘광고라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였던 주인공에게 들이닥친 회한과 무력감이 이 소설의 지배적인 정조다. 광고에 대한 매혹과 야심에 불타는 젊은 후배의 존재는, 그것의 기만을 알아차린 주인공의 내적 의식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현재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연인의 죽음과 그녀와의 추억의 시간대는, 이 소설의 또 한 축인 연애 서사를 구성한다. 미래를 향한 투기라고 할 수 있는 광고 현장과 추억의 방향으로 고개를 빼고 있는 연애 후일담의 이중 교직은 플롯상의 아이러니를 빚어낸다.

서술자의 실존적인 자의식은 광고와 소비의 사회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을 뿌려 놓는다. 사물과 인간을 기호와 이미지로 파악하는 세계에서, 소비는 자율적인 주체의 행위가 아니며, 광고제작 또한 예술적 자율성의 영역이 아니다.

재즈댄스 강사와의 갑작스러운 섹스의 동기는 검은 티셔츠 가슴 부분에 형광 연두 빛으로 각인 된 나이키의 카피 ‘Just Do It’ 때문이다. 카피가 개인 주체를 호명하고, 그 욕구를 명령한다.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 그 가상의 세계를 제작하는데 참여한다. 광고장이인 주인공은 물론, 그의 연인은 메이커 업 아티스트였고, 그의 아내는 푸드 스타일리스트이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뻘 같은 일상을 잊게’해주는 현란한 영상을 만든다.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그 이미지의 그림자 뒤에서 서로를 ‘독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고독에 갇혀 있다. 이것이 ‘장밋빛 인생’의 반어법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주제는 30초 광고의 세계와는 달리 ‘인생은 30초를 지나서도 꿈틀거리고 끈적거리고 소금 냄새를 풍기며 자꾸만 감겨오는 지독한 것’이라는 깨달음 속에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험적인 문법 대신에 언뜻 내비치는 센티멘탈리즘과 익숙한 잠언이 환멸의 수사학을 완성할 때 소재의 진보적인 성격은 그 파괴력을 스스로 제한한다. 그리하여 소설의 마지막 장면 ‘이토록 현란한 동영상 속에서 날 꺼내 줘’라는 절규의 비판적인 의미는 이제 독자 당신의 몫으로 돌려진다.

이광호 문학평론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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