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세상 향한 고독한 외침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

  • 입력 2002년 5월 17일 17시 21분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 유미리 지음 한성례 옮김/ 253쪽 9000원 문학동네

그의 자전적 이력을 엿보고 싶으면 ‘물고기가 꾼 꿈’을 택하면 된다. 때로 고혹적이고 탐미적인 그의 남성관을 엿보고 싶으면 ‘남자’를 펼쳐들 일이다.

연인 히가시의 죽음과 아들의 출산 등 최근의 안타깝고도 치열한 삶의 언저리를 살펴보려면 ‘생명’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의 관심사가 어디에 집중되어있는지 알고 싶으면 여러 단어들을 사전적으로 풀어낸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를 집어드는 것이 좋다.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로서도 성과를 올리고 있는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의 에세이 목록이다.

목록에서 빠진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작가로서 세상을 대면하는 방법, 세상에 대해 발언하는 방법은 어디서 엿볼 수 있을까? 새로 번역된 에세이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은 그 ‘빠진 고리’를 채워줄 수 있는 한 권이다.

“나는 여기에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보았다. 나는 아직도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몇 개인가 큰 균열이 생겨버렸다.…몸은 현실에 두고 있어도 항상 작품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발꿈치를 들고 서 있다. 발꿈치를 들고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을 마주 보고 있다.”

책 전체는 세 개의 독립된 장(章)을 지닌다. 두 번째 장은 사회, 특히 일본사회에 대한 작가의 현실참여적 발언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부분.

권희로씨의 귀국을 맞아 그에 대한 무비판적 영웅화에도, 권(김)희로라는 ‘상징’이 탄생한 사회적 맥락의 의미에 얼굴을 돌려버리는 일본 보수진영에도 따끔한 충고를 가하는 그의 매운 글발은 훗날 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본 우리에게 ‘얼마나 성숙한 생각이었나’라는 곱씹음을 제공한다. 핵실험 반대운동을 전개하면서도 전지구적 차원의 핵 논의에 무관심한 환경운동가들에게도 그의 ‘강펀치’는 그냥 지나쳐가지 않는다.

세 번째 장에서 그는 자신의 ‘싸움닭’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만든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재판에 대해 남김 없이 입장을 밝힌다. ‘돌에서…’는 94년 주간 신초(新流)에 연재돼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의 소설 데뷔작. 한 여성이 ‘이 소설 때문에 내 얼굴에 종양이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큰 심적 고통을 받았다’라고 주장하며 출판 금지소송을 낸 일이 발단이었다.

노벨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등이 원고측 증인으로 가세했고, 유씨는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다. “문학에 대한 최대 위협은 인권주의다. 그것이 무서운 이유는 그 절대적인 가치기준 외에는 인정할 수 없다는 교조주의적 자세를 갖고 있음에도 그것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배후에 숨기고 있다.”

첫 번째 장에서는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할 그의 가족사, 마라토너였던 외조부의 이력에 대한 추적이 펼쳐진다. 2000년 주변의 권고에 따라 외할아버지의 고향 경남 밀양을 방문하고 여러 지인들의 회상을 들었던 기억, 손기정 옹을 만나 “한국어로 이야기했으면 좋으련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너지듯 흐느껴야만 했던 사연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

외할아버지가 죽기 전 남겼다는 말은 손녀가 소설쓰기와 관련해 이어나가야 할 운명을 대신해 얘기한 것은 아닐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보폭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달릴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다. 달린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다.”

글쓰기 역시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고독을 알고 견딤’에 다르지 않다는 감상을 그는 3월, 동아국제마라톤 참가차 방한한 길에 기자에게 밝혔다.

지금도 그는 매일 그 고독한 ‘글쓰기의 마라톤’을 이어나간다. ‘큐큐 파파’(일제시대 장거리 선수들이 호흡 조절을 위해 의식적으로 하던 발음) 가쁜 숨소리를 몰아내며.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