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도시락 폭탄

  • 입력 2002년 4월 11일 18시 30분


1910년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 사이에 맺어진 한일병합 조약부터 따져 ‘일제 36년’ 이라고 통칭하지만 실제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잃은 것은 훨씬 이전이다.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나서는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일본 통감부가 우리 정부에 직접 명령, 내정을 집행하는 힘을 갖게 됐다. 그러니까 일제 41년이라고 해도 크게 틀릴 것이 없다. 을사조약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무력항쟁을 벌였지만 신병기로 무장한 제국주의 군대와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능한 황실과 부패한 대신들이 전쟁 한번 치러보지 않고 국권을 송두리째 넘겨주고 나서 조선의 아들딸은 징병 징용 군위안부로 끌려가는 치욕을 당했다. 일제 군대와 경찰의 감시 하에서 숨죽여 살던 조선 백성들에게 1932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들려온 소식은 가슴을 흔들어놓은 감동이었다.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행사장에는 도시락 물통 일장기만을 소지하고 들어갈 수 있었다. 윤 의사는 기미가요를 따라 부르며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침략자 군대의 장성들을 향해 도시락을 던졌다. 도시락 폭탄의 이야기는 광복 이후까지 두고 두고 이 나라 청소년들에게 나라사랑의 정신을 가르쳐주는 영웅담으로 전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점령돼 괴뢰정부가 들어섰던 프랑스는 그 치욕을 상쇄하는 자존심을 레지스탕스 저항운동과 드골 장군이 영국에서 창설한 자유프랑스 위원회에서 찾는다. 우리에게 상하이 임시정부와 윤 의사가 없었더라면 일제 36년 역사를 기술하기도 부끄러웠을 것이다. 윤 의사는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농민운동가였고 일제와 맞서 싸운 용감한 군인이었다. 1926년에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고향에서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회를 열었고 스스로 농민독본 세 권을 저술했다. 평화 시기였다면 농촌 지도자로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윤 의사가 일본 육군 9사단 공병작업장에서 사형집행된 사진이 발견됐다. 일제는 목제 형틀에 윤 의사를 묶고 총살형을 집행했다. 윤 의사의 미간을 파고 들어간 총알자국이 너무 선명해 사진을 보는 이의 가슴이 아프다. 인근 육군묘지에 봉분도 없이 매장됐던 윤 의사의 유해는 1946년 재일동포들에 의해 발굴돼 국민장을 치르고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사즉생(死則生). 도시락 폭탄은 국권회복 운동을 상징하는 전설이 됐고 윤 의사는 죽어서 영원히 겨레의 가슴 속에 살아남았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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