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집행 안되는 승소판결

  • 입력 2002년 3월 21일 19시 56분


“오랫동안 재판해서 이기면 뭐합니까. 승소해도 내 집을 되찾을 수 없는데….”

승소 확정판결을 받고도 집행이 되지 않아 권리행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다. 법원의 명령을 외면하는 채무자들의 ‘오리발’이 주원인이지만 판결을 원천 무효화시키는 ‘무능한 집행’도 문제다.

▽무능한 집행 사례〓97년 서울 종로구 낙원동 아파트를 임대했던 권모씨는 “월세를 안 내고 있으니 집을 비워달라”며 최모씨를 상대로 소송을 내 승소했다. 2000년 판결 확정 뒤 권씨는 법원 집행관과 함께 최씨를 찾아갔으나 집을 되찾는 데 실패했다. 모 신흥종교 신도인 최씨가 실제 아파트 점유자를 다른 신도의 이름으로 바꿔놨던 것.

권씨는 몇 차례 승계집행 절차를 밟았지만 그때마다 실제 점유자는 바뀌어 있었다. 집행문 송달조차 되지 않았다. 집행관은 “법적으로 집행이 불가능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신도들이 집안에 없는 척하거나 일부러 집을 비우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10월에는 아파트를 찾아갔던 집행관이 1시간 동안 감금되는 등 결국 실패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실패한 횟수만 8차례. 권씨는 집행 이의신청과 명도소송을 계속하며 아직도 법원을 오가고 있다.

▽집행 실태와 문제점〓채권자들은 집행관들이 ‘몸을 사린다’고 불만이다. 그러나 집행관들은 권한이 적어 집행에 한계가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서울지법 소속 한 집행관은 “채무자가 주먹을 휘두르는 경우는 물론 칼을 들이대며 위협하는 경우도 상당수”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최근 한 집행관은 임차인의 위협을 피해 아파트 2층에서 뛰어내리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또 다른 집행관은 관명사칭과 주거침입 혐의로 고소까지 당했다.

집행이 한 번에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두세 차례 시도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인력 낭비 문제도 거론된다. 집행까지 1년가량 걸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집행관에게는 마땅한 대응책이 없다. 법원공무원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어서 아무런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집행관법상 경찰관을 동원할 수 있지만 협조가 잘 안 될 뿐더러 일일이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렵다. 문제가 발생하면 경찰서에 신고해 사후처리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엇갈리는 대책〓법조인들은 판결이 최후 단계에서 집행되지 못할 경우 결국 법이 무력해질 수가 있다고 우려한다.

한 집행관은 “판결을 집행하는 집행관에게 아무런 사법적 권한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미국 등 다른 나라처럼 집행관에게 일정한 권한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은 경찰과의 협조를 강화하는 쪽이 더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판결의 집행 자체가 채무자에게 큰 충격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강제력 행사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국가가 개인간 채무관계 해결에까지 세금을 써가며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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