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동우/파업 중독증

  • 입력 2002년 3월 3일 18시 24분


양동생과 배일도.

우리 현대 노동운동사에서 이 두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양동생은 대우조선 노조 초대위원장으로 87년부터 89년까지 3년에 걸쳐 이 회사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두지휘한 인물. 배일도 역시 대단한 노동운동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87년 서울지하철 노조를 결성해 초대 위원장을 지냈으며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의장, 전노협 대기업노동조합 특별대책위원장 등을 거쳐 99년 10월 제9대 서울지하철노조위원장으로 다시 복귀했다. 그는 지난달 지하철 노사합의 내용이 조합원 투표에서 부결되는 바람에 위원장직을 조만간 내놓을 예정이다.

이 두 사람은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전국적인 규모의 파업을 이끌던 초강성 노동운동가였다는 점이 그렇다. 먼저 양씨는 6·29선언이후 막히고 억압받았던 노동자들의 욕구가 봇물 터지듯 했을 때 현장 노동운동가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인물이다. 배씨 역시 88년 6월 사상 최초의 지하철 파업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그 뒤 구속되어 해직당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을 떠올리는 이유는 지금도 일부 계속되고 있는 최근의 공공노조 연대파업 때문이다. 이번 연대파업에서 철도와 가스노조의 파업이 끝난 후 도대체 노조가 얻어낸 것이 무엇이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발표된 노사 합의 내용은 파업 돌입 전에 이미 합의에 도달해 있었던 것으로 이들 노조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에 의해 등을 떼밀려 파업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전국민을 불편하게 하고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리는 파업을 왜 했느냐는 비판이 뒤따랐다.

뚜렷한 성과도 기대되지 않는 파업을 왜 했을까. 여기에 대한 노동연구원 최영기 부원장의 분석은 흥미롭다. 한마디로 양대 노총 지도부가 ‘파업중독증’에 걸려있다는 지적이다.

최 부원장에 따르면 특히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 등을 내걸고 98년 현대자동차, 99년 서울지하철공사, 2001년 대한항공 등 대규모 분규의 후원자 노릇을 했으나 매번 당초 요구에 휠씬 못 미치는 성과만 남겼을 뿐이라는 것. 이는 지도부가 과거의 투쟁 일변도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파업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듯 행동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99년 4월 서울지하철공사 노조 파업의 경우는 2000여명의 인력감축이 주요 쟁점이었고 당시 서울시 측이 구조조정을 원점에서 논의하자는 획기적인 제안을 했는데도 8일간의 파업이 강행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양씨와 배씨의 유사점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둘 다 그 뒤 거짓말처럼 온건 합리적 노동운동주의자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양씨는 90년 노조위원장 임기를 1년여나 남겨두고 돌연 위원장직에서 자진사퇴했으며 그뒤 회사까지 그만둔 후 지금은 서울 신월동에서 개척교회 목사로 재직 중이다. 그는 대우조선 파업이후 일관되게 ‘노동운동은 화합운동이며 사랑운동이어야 한다’며 노사상생의 노동운동을 주장하고 있다.

배씨의 경우 이번 연대파업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입장표명을 하고 있다.

“이제 노조 운동가들은 투쟁일변도에서 벗어나 노동운동을 사회의 운영원리라는 틀 속에서 봐야 합니다.” 지도부가 인기에 영합해서 선동적인 계급투쟁식 파업을 택할 경우 결국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조합원들의 자존과 권리마저 지켜내기 어렵게 된다는 지적이었다.

극한 투쟁을 직접 이끌었기 때문에 그 한계와 허구를 누구보다도 깊이 체득한 데서 온 것일까. 양씨와 배씨의 사고변화는 우리 노동운동의 가야할 방향과 관련,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정동우 사회2부장 for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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