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얼마 못산다 하니… '소멸의 아름다움'

  • 입력 2002년 3월 1일 17시 49분


소멸의 아름다움/필립 시먼스 지음 김석희옮김/256쪽 8500원 나무심는 사람

‘인간은 고집스런 동물이라서 삶을 새롭게 바라 보려면 강한 충격이 필요하다. 내 경우 그 충격은 고작 서른다섯 살에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5년 안에 죽게 되리라는 소식이었다.’

책은 저자의 이런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는 영문학교수로서 또 장래가 촉망되는 문인으로서 이제 막 생의 활기찬 걸음을 내딛으려던 순간, 갑자기 ‘죽어가는 기술’(Art of dying)을 배워야 하는 암담한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8년여가 지난 지금 그는 통계적으로 벌써 죽어야할 처지이지만 오히려 ‘살아가는 기술’(Art of living)’을 터득해 가고 있다. ‘한 번에 찻숫가락으로 하나씩 생명을 덜어내는, 느리고 성가신 폭력’에 매일 시달리고 있지만 오히려 그 결핍과 불완전속에서 비로소 삶을 완전하고 충만한 시선으로 받아 들이게 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차피 삶이란 죽음을 앞둔 상태인데 언제 죽음이 닥칠 지 모른다는 공포가 항상 눈앞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날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삶이 어떻게 충만해질 수 있는지, 깨진 꿈이 어떻게 우리를 더 완전한 상태로 깨어나게 할 수 있는 지 생각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결핍과 불완전이라는 고통에서 방황하다 삶의 완전함을 깨닫고 다시 돌아온 일상은 똑같지만, 다른 세상이다.

‘지금 나는 휴지 한 장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겹다. 하지만 병에 걸린 덕분에 나의 행동을 신성(神聖)의 맥락안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건강할 때는 수건으로 아이 얼굴을 닦아주는 일같은 것이 귀찮은 일거리였지만 이제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와 내 삶을 나눠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다. 까마귀가 들판에 내려 앉는 것을 볼 때, 아이가 빵에 버터바르는 것을 지켜볼 때, 밭에 심은 콩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는 늙은 농부의 얼굴을 바라볼 때, 나는 이제 그 순간을 신성한 것으로 인식하게 됐다.’

고통조차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신비’로 받아 들이며 마음을 열면 이 세상은 해결해야 할 것들로 가득찬 문젯 덩어리가 아니라 사랑으로 변형된 곳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생이란 것도 언젠가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날이 오기 때문에 ‘낙법(落法)배우기(learning to fall)’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꿈의 좌절, 체력의 저하, 희망의 좌절,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부상을 당하거나 병에 걸림…. 택할 수도 없고 언제 어떻게 닥쳐올지도 모르는 이런 고통에서 자유로우려면 인생의 낙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낙법이란 다름아닌 ‘놓아 버림’이다. 평소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성취, 계획,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놓아 버리기만 하면 가장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쓴 열두편의 수필속에는 죽음 앞에서 삶을, 일상에서 신성(神聖)을, 초조함속에서 여유를, 몸의 불편함에서 낙관을 배워가고 있는 통찰이 담겨있다. 따라서 이 책은 역경을 이겨 낸 인간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시련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시선을 바꾼 한 생활인의 일상사에 대한 세세한 관찰과 사색의 기록이다. 저자가 처음에 자비(自費)로 출판했다가 입소문만으로 수천부가 팔려 나가자 미국의 대형 출판사인 벤텀북스에서 판권을 사서 다시 출간했다고 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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