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호택]평등의식과 귀족학교

  • 입력 2002년 2월 25일 18시 00분


서울 강남지역과 함께 고학력 중산층이 몰려 사는 수도권의 분당이나 일산에서 교육개발원이 2000년 10월 시행한 여론조사에서는 평준화 지지율이 70%를 조금 웃돌았다. 교육 당국은 이 여론조사를 근거로 수도권 신도시에 평준화를 확대해 신흥 명문 분당 서현고와 일산 백석고에 3월 처음으로 시험을 치르지 않고 컴퓨터 배정을 받은 학생들이 입학하게 된다.

교육부는 평준화를 유지하는 주요 논거로 여론조사 결과를 내세우지만 70%라는 다수가 합의했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 교육정책이라고 볼 수 없다. 분당 일산의 평준화 지지율은 자녀가 비명문고에 다니는 학부모의 비율과 대체로 일치한다.

한국 경제의 싱크탱크라고 할 수 있는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비전 2011’ 보고서를 통해 고교평준화 제도의 전면 개편 방안을 제시하면서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다. KDI 개선안의 핵심은 사립학교에 학생 선발권을 돌려줌으로써 여유 계층의 수요를 끌어들이고 정부 재정을 공립학교에 집중 투자하자는 것이다.

▼평준화 매달리다 교육질 하락▼

미국 영국 일본의 사립학교들은 학생 선발, 등록금 책정 등 학교 운용과 관련해 정부의 간섭을 일절 받지 않는다. 등록금은 비싸지만 교육의 질이 우수하고 명문대 진학률도 높다. 일본은 사립고가 공립에 비해 등록금이 8배가량 비싸다. 미국에서도 연간 등록금이 평균 2만∼3만달러 정도여서 여유 계층의 학생이라야 입학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사고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 평등의식이 이러한 귀족학교를 용인하지 않을 뿐더러 사립고교의 비율이 이들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아 모든 사립학교를 평준화에서 풀어주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립학교의 비율이 미국은 10∼13%, 영국과 일본은 10% 안팎이다. 한국은 사립고의 비율이 47%로 절반에 가깝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으로 교육 투자를 게을리하다가 평준화에 모든 교육 문제의 책임을 미루는 것도 일종의 마녀 사냥이다. 선택이 일거에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보는 것은 시장 지상주의적 관점이다. 시장의 실패도 있는 것이고 완전한 선택이 보장되는 시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평준화 이전의 고교 입시는 중학교에서 정상적인 교육이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과열돼 있었다. 평준화를 도입한 28년 전과 시대적 상황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당시 교육현장의 문제가 지금 전부 해소됐다고 보기 어렵다.

KDI의 견해가 이처럼 과도한 단순화의 결함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논리에 바탕을 둔 몇 가지 관점은 교육 쪽에서 경청할 가치가 있다. 극도로 선택을 제한하는 공산주의 방식은 필연적으로 하향 평준화를 부를 수밖에 없다. 경제나 교육이나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질 높은 학교교육에 대한 수요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국내에서 공급이 되지 않으니 이산가족이 되는 고통을 감수하며 자녀를 외국으로 내보낸다. 사교육비로 유실되는 막대한 재원을 공교육으로 끌어들이고 조기유학으로 새나가는 달러를 붙잡아둘 수 있다면 자립형 사립고든 귀족학교든, 이름이야 어떻든 만들어볼 만하다. 10개로 부족하면 시장의 수요에 맞게 100개가량 만들어볼 수도 있다. 이런 학교는 100% 수요자 부담으로 돌리고 여기서 생긴 정부 재정의 여유분을 공립학교로 돌리면 서민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교육부는 자립형 사립고를 확대해 평준화 제도를 보완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올부터 자립형 사립고로 운영되는 고교는 전국에서 3개뿐이다. 그것도 모두 비평준화 지역에서 이미 학생을 자체 선발하던 학교들이다. 내년에는 고작 두 개가 늘어난다. 굼벵이가 기어가는 속도 보다 느리다. 자립형 사립고가 시군구마다 두세 개 정도 생기기까지 기다리려면 부지하세월이다.

▼고급인력 양성 또 머뭇거린다면▼

교육부에 평준화에 관해 일관된 원칙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교육부는 평준화 시행 28년 동안 평준화의 축소와 확대를 오락가락했다. 주민여론이 지지한다는 이유로 수도권 신도시에서 고교 입시를 없애놓고 나서 학교 배정도 제대로 못해 소란을 빚는다. 교육부 장관이 4년 만에 7번째로 취임하는 판에 장관이 뭘 제대로 해볼 시간 여유가 없다. 자립형 사립고를 밀고 나가던 장관은 서울시 교육청의 반대에 부닥쳐 우물쭈물하다가 얼마 안 돼 바뀌었다.

‘비전 2011’ 보고서가 지적한 대로 지식정보화 시대에 경제 사회발전의 원동력은 인적자본이다. 인적자본의 양과 질에 의해 나라의 경쟁력과 삶의 질이 좌우된다. 산업화시대에 짜여진 획일적이고 경직된 교육제도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인적자본의 질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여기서 또 머뭇거리다가는 10년 세월이 훌쩍 흘러가 버릴 것이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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