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프볼]드래프트 2번 정훈 "내가 짱"

  • 입력 2002년 2월 19일 10시 15분


- 두 번째는 없다. 나는 두 번째 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002 KBL 신인 드래프트의 최대 관심사는 ‘김주성’이 어느 팀으로 가게 되느냐 였다. 드래프트가 끝나고 나서도 언론들은 김주성의 취재에 열을 올렸을 뿐, 그 이외의 선수들에게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간간히 2순위로 지명된 정훈을 거론하기는 했지만, 김주성의 그것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정훈의 본래 나이대로라면.. 김주성과 같은 해에 드래프트 대상자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실제 정훈은 빠른 `79년생으로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 `98학번이 아닌 `97학번이어야 했다. 다시 얘기해서, 나이대로라면 2001년 드래프트 대상자였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송영진, 김승현과 함께 말이다. (정훈은 가장 친한 동료 선수로 김승현을 꼽기도 한다.)

뒤늦게 농구를 시작했던 정훈은 농구를 하기 위해, 1년이라는 시간을 농구선수가 되기 위한 준비의 기간으로 보냈다. 운동 선수들 중, 꽤 많은 숫자가 정훈과 같은 시간을 가지곤 한다. 일종의 휴학기라고 해야 하나? 이번 드래프트에서 5순위로 SK나이츠에 선발된 이한권(고등학교 시절부터 정훈과 함께 농구를 해온 선수이기도 하다.)도 그렇고, 한양대의 박유진(11순위로 삼성)도 그러한 선수다.

- 내가 좋아하는 것은 운동..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정훈은 역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이 되던 해에 클럽활동으로 육상을 시작했다. 4학년이 되면서는 정식으로 육상을 배우기 위해 녹번 초등학교로 전학하였으나, 녹번 초등학교의 육상부가 해체되면서 육상 선수로의 꿈은 접어야 했다. 그러나, 운동을 계속하고 싶어했던 정훈은 그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야구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는 일본에서 열린 리틀 야구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을 정도로, 정훈의 운동 적응력은 남달랐다. 하지만, 야구를 계속 하기 위해서 충암 중학교로 진학한 정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처음 맞은 중학 1학년의 늦봄에 야구를 그만두어야 했다. 항상 운동을 하고 싶어했던 정훈이었던 만큼, 그것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결정된 일이었다.

- 명지 고등학교에 입학 = 농구와의 인연.

야구를 그만 둔 정훈은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 중학시절을 보내고 운동 특기생이 아닌, 일반 학생의 신분으로 명지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교직에 몸을 담고 있는 정훈의 아버지 ‘정석조’씨는 친선으로 열리는 지역 학교 대항 교직원 테니스 대회에서 명지 고등학교에 재직중인 ‘민형준’ 선생과 가까워지게 되었고, 이후에도 서로 테니스를 치며 친분을 쌓았다. 정훈이 명지고에 재학 중이라는 이유로 ‘민형준’ 선생에게 “우리 애 좀 잘 봐줘~!”라는 말을 했던 ‘정석조’씨는 당시의 그 말이 아들의 인생을 바꿔놓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농구부가 있는 명지 고등학교.. 친구 사이로 지내게 된 ‘민형준’ 선생이, 바로 명지 고등학교 농구부의 감독이었던 것이다. 별 뜻 없이, “내 아들이 명지 고등학교 다니고 있으니까, 잘 좀 봐주라~”고 시작된 이야기에서 민형준 감독은 정훈이 ‘정석조’씨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진학 당시 키가 192cm였던 정훈을 입학할 때부터 점 찍어 두었던 민형준 감독은 이미 정훈에게 ‘농구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훈은 야구를 중도 포기해야 했던 아픈 과거 때문에 민감독의 제의를 딱 잘라 거절 했었다. 그런데, 친분을 가지게 된 ‘정석조’씨가 그 학생의 아버지라니.. 민감독으로서는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 농구 선수로의 선택, 가족과 주변인 들..

평소, 키가 크고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들의 재능을 썩히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던 ‘정석조’씨는 아들을 테스트 해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민감독의 제의를 흔쾌히 승낙했다. 무녀독남의 외아들이기에 운동선수를 시키는 것이 꺼려질 만도 할 텐데, 농구에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던 정훈의 어머니 ‘백승희’씨도 남편의 결정에 스스럼 없이 동참했다. 실은 ‘백승희’씨의 경우, 초등학교 시절 아들이 야구를 시작했을 때, 야구 보다는 농구를 선택하기를 바랬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입학 당시에도 192cm에 67kg이었던 정훈은 초등학교 시절에도 자신의 마른 다리를 내보이는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종목의 운동은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세웠다. 그 바람에 농구 하기를 바랬던 엄마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양 부모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정훈은 명지 고등학교 농구부의 입부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물론, 부모님이 억지로 정훈을 농구선수가 되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정석조’씨와 ‘백승희’씨는 테스트를 받고 난 후, 아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1주일 동안의 시간을 주었다. 당시 명지고의 코치였던 박성근 감독(현 성균관대)과의 인연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입부 테스트를 받는 정훈을 보고 그의 입부를 학수고대했던 것은 민감독이 아닌 박성근 코치(당시 명지고)였다. 잠시였지만 육상과 야구를 했기 때문에 기본기를 갖춘 정훈의 볼 캐치 능력과 수비력, 키에 비해 안정된 자세를 본 박성근 코치가 정훈의 농구 시작을 민감독 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던 것이다.

정훈의 절친한 친구들도 그가 농구를 시작하는 것에 대찬성이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나 바라는데, 다리가 드러나는 유니폼이 대수였겠는가? 고심하던 정훈은 테스트를 받고 딱 1주일만인, 부모님과 약속한 바로 그날.. 농구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때가 고등학교의 1학년 1학기가 대부분 지나갔을 무렵이기에 정훈은 농구를 막 바로 시작할 수 없었다. 특기생으로 진학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훈은 자퇴를 하고 그 다음해에 농구부 특기생으로 다시 명지고에 입학했다. 이글 맨 처음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농구선수로서의 도약을 위해 정훈은 한 학년을 반납했다. (김주성도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농구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정훈과는 상황이 달랐다.)

정훈은 그렇게 농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Ⅱ부에서 계속..

吳세정/osjtweety@hanmail.net

(제공:http://www.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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