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찬근/유럽학계 '北붕괴' 점친다

  • 입력 2002년 2월 16일 18시 10분


이찬근
평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유럽의 주류 학계는 대서양 연대에 충실하다. 필자가 인터뷰한 스위스 스웨덴 독일의 중요 학자들은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간주한 조지 W 부시 미국 정권의 북한관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다. 국민이 체형이 바뀔 정도로 혹독한 식량난과 경제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체제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의미하며, 이런 체제를 그대로 두는 것은 인권 차원에서도 묵과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이들은 중국의 장래에 대해서도 비관적이다. 공기업과 금융부문에 숨겨진 부실의 규모가 심각하며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따라 대외적 경쟁압력을 견뎌내기 힘들 것으로 본다. 매년 1만여건씩 발생하고 있는 지방의 소요 사태를 막으려면 중국 정부는 예산의 상당부분을 낙후지역에 투입해야 하는데, 이로써 정권 유지 차원에서 그동안 무리하게 지탱해온 공기업 금융부문은 과격한 구조조정과 대량 실업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기업들은 對北진출 앞다퉈▼

이러한 전망을 북한에 대입하면 급작스러운 붕괴 시나리오는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멸망한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국제사회의 인도적 구호물자와 중국의 전략적 지원에 의존해 벼랑 끝에서 버텨온 북한은 두 버팀목을 모두 잃게 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 학자는 궁지에 몰린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동독을 서독에 팔아먹었듯이(?) 중국이 북한의 손을 놓아버리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이제는 미국 일본 한국의 동맹 축에 중국까지 포함시켜 비상사태에 대비한 도상계획을 마련할 때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재계 사람들을 만나보면 북한 시장 선점을 위한 발걸음이 비교적 분주하다. 일례로 스웨덴에선 ABB, 볼보, 에릭슨 등 유력 기업들이 참가하고 있는 재계의 국제협의회는 에너지 텔레콤 물류 등 5개 분야에 대한 대북 지원사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또 이 협의회는 스웨덴의 시카고보이스라고 할 수 있는 스톡홀름경제대학을 내세워 김일성대학의 경제학 교수진을 대상으로 시장경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할 채비를 차리고 있다.

독일도 예외가 아니다. 구 동독으로부터 북한 파일을 인계 받은 독일은 대북 경협의 선두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인상이다.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크게 의식할 필요가 없는 바이에른 주정부는 북한으로부터 정보기술(IT) 관련 유학생을 50여명 받기로 합의했고, 함부르크에 소재한 재계의 동아시아클럽은 지멘스와 폴크스바겐 등 17개 독일 대기업의 공동대표사무소를 평양에 설치했다.

이들은 과거 한국이 그러했듯이 북한의 권위주의적 정권이 국민 개개인의 이니셔티브를 경제성장에 잘 접목한다면 또 하나의 경제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며 기대감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에선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봉쇄정책을 지지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북한 지도층과 경협의 실마리를 풀어내려고 부심하는 유럽 각국의 모양새는 언뜻 보기에 모순과 편견으로 얼룩진 기회주의의 극치이다. 이들로부터 북의 갑작스러운 붕괴가 가져올 한반도의 총체적 경제사회 파탄에 대한 우려를 찾아보기 어렵다.

12년 전 막강한 경제력의 서독이 물량 공세로 동독을 접수했음에도, 동독경제는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다. 인구 비중에선 동독이 독일 전체의 17%를 차지하는데 실업자의 3분의 1은 동독의 몫이고, 제조업 생산과 수출실적은 각각 독일 전체의 8%와 6%에 불과하다. ‘한 민족 두 체제’를 ‘한 민족 한 체제’로 바꾸겠다는 통일의 비전은 결국 ‘두 민족 한 체제’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정치논리로 통일 다루지말라"▼

구 동독 마지막 정권에서 경제장관을 역임했고, 현재 베를린경제대학 교수인 크리스타 루프트 여사는 남북한 통일에 대한 조언을 부탁한 필자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정치적 논리로 통일문제를 다루어선 안 된다. 동서독에 비해 격차가 훨씬 심각하고, 필요한 자본의 수혈 등 초기 조건에서 크게 불리한 남북한의 경우 정치군사 논리로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남북한이 각기 체제를 유지하면서 북한의 회생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이 남북한 대중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책이다. 남북한은 통독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이찬근 인천대 교수·경제학 제네바 소재 개발문제연구소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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