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DJ의 '심리적 공황'

  • 입력 2002년 2월 1일 18시 11분


1·29 개각 이틀 후 만난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에게 “이번 개각에 대한 민주당의 대체적인 반응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안 좋지요” 한다. “아니 그럼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은 집권여당까지 고개를 젓는 그런 개각을 왜 했을까요?” 하고 다시 물었더니 그는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대통령께서 아무래도 심리적 공황인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연두기자회견 얘기를 꺼냈다. “그때 DJ가 매일 터져 나오는 ‘게이트’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고 했잖아요. 그게 바로 심리적 공황이 아니고 뭐겠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대통령이 온 국민이 보고 들을 연두회견에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말을 어떻게 합니까.”

심리적 공황이라…. 심리적으로 쫓기고 불안정하다보니 올바른 판단력마저 잃은 게 아니냐는 얘기 같은데 ‘게이트’에 처조카가 연루되고 믿었던 수석비서관들까지 줄줄이 옷을 벗는 마당에 노(老)대통령의 심기가 편할 리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심리적 공황까지?

▼'朴에 의한 朴을 위한 개각'▼

그러고 보면 그럴 듯도 싶다. DJ는 1월 14일 연두회견에서 ‘게이트’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개각에 대해 차분히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29일 개각이 됐으니 DJ는 연두회견 후 보름 동안 ‘차분히 생각해서’ 인선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인선 내용을 보면 아무래도 ‘차분히 생각한 올바른 판단’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이한동(李漢東) 총리를 유임시킨 것은 애써 다른 인물을 골라봐야 원내 과반수 의석에 육박한 한나라당이 호락호락 국회 동의를 해줄 것 같지 않아 그랬다고 치자. 그러나 박지원(朴智元) 정책특보라는 위인설관(爲人設官)까지 굳이 해야 했을까?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박 특보는 한나라당이 질색하는 것은 물론 민주당 쇄신파에서도 ‘인적 청산 대상’으로 찍은 인물이다. 그러니 박 특보가 아무리 ‘DJ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는 유능한 참모’라 한들 그를 청와대로 다시 불러들여서는 온갖 ‘정치적 해석’이 난무하리라는 것이 뻔한 노릇이다. 정치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겠다는 DJ의 약속조차 당장 의심받으리란 것도 예상대로다. 그런데도 DJ는 한나라당의 비난대로라면 ‘박지원에 의한, 박지원을 위한 개각’을 단행했다. 이 또한 ‘심리적 공황’ 탓일까? ‘DJ가 그동안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누가 뭐라 하든 곁에 둘 ‘심복’이 필요하다는 변호가 맞다면 틀린 해석은 아닌 듯도 싶다.

문제는 ‘심리적 공황’에 따른 인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점이다. 박 특보는 “대통령의 정치불개입 약속이 의심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을 하러 내가 왔다”고 했다. 그러나 DJ가 정치불개입 약속을 지키는 데 그가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인지, DJ가 자꾸 정치에 개입하고 싶어해 그걸 자신이 막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대신 개입하겠다는 것인지 헷갈린다. 더구나 ‘정치 뚝, 경제 온리(Only)’라면서 경제전문가도 아닌 그가 구태여 나설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아리송하다. 일단 믿어보시라니 믿어봐야겠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석연치 않은 것은 또 있다. 대과 없이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던 최경원(崔慶元)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예상 밖 전격경질이다. 검찰 내 특정지역 출신에 대한 물갈이 인사안을 놓고 최 전 장관이 청와대 측과 견해차를 보였기 때문이라는 풍문에 대해 청와대 측은 ‘음해’라고 펄쩍 뛴다. “그동안 검찰 고위간부가 비리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데 대해 정치적 감독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생이 직접 ‘게이트’에 연루된 검찰총장에 대해서는 특검 수사로 동생이 구속될 때까지 감싸기만 하더니 법무장관에게는 칼처럼 정치적 감독책임을 묻는다면 누가 봐도 공정한 잣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신임 검찰총장에다 법무장관까지 비호남 출신이니 하나라도 ‘믿을 수 있는 우리 사람’으로 바꿔 앉혀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라는 해석이 맞는다면 이 역시 ‘심리적 공황’과 무관치 않을 터이다.

▼정권 끝나기 前 비리 청소를▼

이제 DJ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현 정권하에서 저질러진 온갖 권력형 비리를 정권이 끝나기 전까지 말끔히 청소하는 것이다. 행여 법무장관에 ‘우리 사람’을 앉혀 적당한 선에서 덮고 가려다가 의혹이 차기 정권으로 이월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니겠는가. DJ가 ‘심리적 공황’에 빠진 것 같다는 민주당 중진의원의 염려가 기우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번의 ‘이상한 개각’으로 남은 1년이 어찌 굴러갈지 걱정이라는 그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더니!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