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우룡/굿바이 ‘게이트 공화국’

  • 입력 2001년 12월 30일 17시 44분


또 한 해가 저문다. 지난 1년 이런저런 기쁜 일도 많았고 감사해야 할 일도 적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불신과 절망, 좌절과 통분으로 얼룩진 부끄러운 한 해이기도 하다. 매일 밤 우리들이 텔레비전 뉴스 속에서 보아온 주요 인물은 포승줄에 묶여 수감되는 기업인, 정치가, 공직자, 장군들이었고 검은 돈에 연루된 고위층은 하나같이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 전직 장관, 정당 위원장, 공기업 사장, 비서관 등이었다.

▼꼬리 문 게이트… 실종된 개혁▼

나라가 얼마나 부패했으면 건드리면 터지는 게 게이트인가. 이용호, 정현준, 진승현, 윤태식 등으로 이어지는 꼬리에 꼬리를 문 게이트의 악취는 온 나라를 뒤덮었다. 우리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터지는 사건마다 주역의 한 사람은 국가권력기관의 실력자로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믿을 사람이 없는’ 사회, 그것은 국민의 불행이자 절망이다. 오죽했으면 ‘게이트 공화국’이라는 비판이 나왔을까. 부정과 부패, 비리와 부조리는 우리사회 곳곳에 뿌리깊게 만연해 있는 느낌이다. 어디 그뿐이랴. 이제 대통령의 신변 안전까지 국민이 노심초사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며칠 전 신문에는 한 살인범이 대통령과 마주서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장의 컬러사진이 실렸다. ‘살인범을 두 번씩이나 대통령 앞에 세우다니… 신원검증 구멍 뚫렸나’, 기사의 제목이다.

2001년 영화계는 곽경택 감독의 ‘친구’를 기폭제로 삼아서 ‘신라의 달밤’, 그리고 ‘조폭마누라’에 이어서 ‘달마야 놀자’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이른바 조폭 신드롬으로 한 해를 보냈다. 조폭은 학교와 절간, 안방만 점령한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항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ROTC공화국이다.’ ‘리퍼블릭 오브 무엇무엇’이라는 뜻이다. 하나는 ‘total crises’, 곧 총체적 위기 국가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total corruptions’, 곧 총체적 부패국가라는 의미다. 이 우스개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연초부터 요란스럽던 개혁과 사정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조세정의를 내세운 언론개혁은 어떻게 되었는가. ‘운동가’들 중에 좋은 자리에 취직된 인사들이 여럿 생겨났다. 세금을 추징하고 탈루 세액을 높이는 데 온갖 지혜를 짜냈지만 구속되었던 사주들은 풀려난 지 오래다. 비판적 신문에 대한 보복은 감정 플레이로 끝이 났고 언론 길들이기는 ‘타도정권’의 부메랑 효과만 낳았다.

일본 교과서 파동은 얻은 것 하나 없는 나 홀로 시위로 막을 내렸고 무능한 어업협상은 꽁치조차 마음놓고 먹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우리 국민이 중국에서 처형되었는데도 뒷짐만 지고 있던 망신외교에는 솜방망이 징계가 고작이었다. 중대한 실책에도 책임지는 자가 아무데도 없다. 군납 비리, 병무 비리는 고질적인 한국병으로 자리잡았고 퍼붓는 공적자금은 눈먼 돈이 돼 버렸다. 건강보험은 재정파탄을 맞아서 오히려 국민건강을 위협하고 있고, 철마다 바뀌는 대입제도에 이 나라 교육은 병들고 있다. 금강산 관광과 이산가족 상봉으로 상징되는 햇볕정책에도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으며 대졸 젊은이들은 갈 곳을 잃고 있다.

▼새해엔 페어플레이를▼

과연 ‘준비된 것’이 무엇이었나. 과욕으로 빚어진 무리수들은 부작용과 반발, 국론분열만 가져왔다. 새해에는 인사탕평책을 쓰겠다고 당국자는 공언하고 있지만 ‘정권의 끝’이 보이는데 달려갈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다시 새해가 밝아온다. 새로운 기대와 희망으로 환희의 새해를 맞고 싶다. 신바람 나서 일하고 열심히 세금 내는 사람이 많은 나라, 법과 질서가 지배하고 서로가 제 몫을 해내는 ‘심포니 사회’를 꿈꾸게 된다. 새해 한 방송사의 연중 캠페인 구호는 ‘정정당당, 코리아!’다.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사는 이웃이 정말 그립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기회균등과 공정경쟁이다. 페어플레이를 앞세우는 정직한 사회만이 ‘제왕적’ 지도자와 ‘도둑’ 아버지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콩이 썩으면 새싹이 나는 법이다. 꿈꾸는 자에게 미래가 있지 않은가.

김우룡(한국외대 정책과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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