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월드컵]“월드컵 입장권이 한국행 비자”

  • 입력 2001년 11월 30일 18시 48분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 L씨(45)는 지난달 29일 한국으로 일시 귀국하기 전에 베이징(北京)의 조선족 동포 10여명으로부터 내년 월드컵 입장권을 구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또 베이징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한국인 P씨(35)도 최근 만나는 조선족 동포마다 같은 부탁을 해 고민에 빠졌다. P씨는 “대부분이 축구를 보러 가기보다는 한국에서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들”이라며 “일단 한국에 들어가면 불법 체류할 것이 뻔하다”고 말했다.

내년 월드컵에서 중국 축구팀이 한국에서 경기하는 것이 확정되면서 중국인 관광객은 물론 조선족 동포들도 월드컵 입장권을 구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문제는 월드컵 입장권이 한국에서의 불법 체류를 위한 ‘티켓’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서 오는 월드컵 관광객들과 함께 불법 체류를 목적으로 입국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월드컵 입장권 구입 열풍〓중국 여행사에 입장권 구입을 문의하는 것은 물론 친분이 있는 한국인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사례도 많다. 이런 가운데 주중 한국영사관 주변의 비자 브로커들도 입장권 구입을 위해 곳곳에 손을 쓰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비자 브로커로 알려진 조선족 동포 K씨(31)는 “월드컵 입장권을 내밀면 한국 비자를 받기가 훨씬 쉽기 때문에 10∼20배의 웃돈을 주더라도 입장권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과 선양(瀋陽) 등지의 조선족 동포들에게는 한국 비자를 받는 데 1인당 6만5000위안(약 1000만원)이 들어간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 하지만 이런 돈을 지불하더라도 한국행은 쉽지 않다. 불법 체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비자가 발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

이에 따라 조선족 동포들은 적은 돈으로 쉽게 한국에 갈 수 있는 월드컵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불법 체류자 급증 우려〓월드컵 기간 중 한국을 찾게 될 중국인 관광객 수는 줄잡아 10만여명. 국내 관광업계는 대회를 전후해 이보다 훨씬 많은 20만∼30만명이 한국을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중 다수가 한국으로 건너가 불법 체류하며 돈을 벌겠다는 ‘딴맘’을 먹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몇 만명이 불법 체류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내에 불법 체류중인 조선족 동포들은 “10년치에 해당하는 거금을 브로커에게 건넨 뒤 밀항하다 목숨까지 잃는 상황에서 다수의 조선족 동포와 중국인들은 이번 월드컵대회를 최대의 기회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당국도 답답한 사정을 호소하기는 마찬가지.

주중 영사관 관계자는 “다음주 긴급 대책회의를 갖기로 했지만 뾰족한 방안이 없다”며 “단체 여행객만 받는다는 게 정부 방침이지만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개별적으로 입장권을 구입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표를 들고 오면 비자를 발급하지 않을 수 없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불법 체류 문제에서 보면 중국팀의 한국 방문은 ‘뜨거운 감자’”라며 “대회를 전후해 불법 체류자의 단속을 강화한다는 원칙 외엔 솔직히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도 “현재로선 경기 입장권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단기 비자(90일 이내)를 발급해 줄 수밖에 없다”며 “부처간 협의를 거쳐 불법 체류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상호기자·베이징〓이종환특파원>ysh1005@donga.com

▼"10만명 비자 어떻게 내주나"▼

▽비자발급 업무 폭주 우려〓주중 대사관과 총영사관은 내년 월드컵을 앞두고 비자 발급 업무가 폭주할 것으로 예상돼 벌써부터 전전긍긍하고 있다. 비자 발급시 제출해야 하는 월드컵 입장권이 대부분 대회 시작 한달 전에야 중국 내 예매자들에게 전달될 상황이어서 10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중국인 관광객들에 대한 비자 발급 업무가 빨라야 내년 4월 말부터나 가능하기 때문.

외교부 관계자는 “월드컵 조직위원회와 FIFA간의 입장권 디자인 등에 대한 협의가 늦어진 탓”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중국 내 재외공관들은 내년 4월부터 한 달간 약 10만건의 비자 발급을 처리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이는 중국 내 5개 재외공관들이 1년 동안 처리하는 업무에 해당할 정도.

현지 관계자들은 “현재로선 모든 직원을 동원한다고 해도 분당 2건의 비자를 발급해야 하는 실정”이라며 “비자 발급을 대회 일정에 맞추지 못할 경우 현지 중국인들의 집단 항의마저 우려된다”고 말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정부 차원의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이 상태론 불법 체류자를 가려내기 위한 최소한의 심사 절차도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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