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약 없다고 환자 방치하는 나라

  • 입력 2001년 11월 27일 18시 45분


보건정책의 기본은 국민 건강을 지키는 데 있다. 아픈 사람이 병원에 가 치료를 받고 약을 먹는 것은 국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그런데도 만성 중증결핵환자가 복용해야 하는 약이 제약회사 부도로 생산이 중단된 지 한 달이 넘도록 보건당국이 손놓고 있었다니 그 ‘무책임 행정’이 놀랍다. 북한에 결핵백신을 몽땅 보내는 바람에 사흘 동안 전국 보건소 백신이 바닥났던 게 이달 초의 일이다. 이러니 북한에는 있는 대로 다 퍼주면서 국민 건강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는 비판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생산이 중단된 ‘파스’는 만성 중증결핵환자에게만 투여되는 약이다. 결핵 초기치료에 실패한 환자에게 2차약이 듣지 않을 경우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권하는 게 ‘파스’다. 중증 결핵환자의 경우, 다른 약에는 이미 내성(耐性)을 갖고 있기 때문에 ‘파스’ 공급이 중단되면 생명을 잃는 것은 물론 내성이 강해진 결핵균이 퍼져 다른 사람의 건강까지도 위협하게 된다.

더욱 큰 문제는 국내 10만여 결핵환자 가운데 1만여 명에 이르는 만성 중증환자들 대부분이 극빈층이라는 데 있다. 이들은 약을 먹는 외엔 다른 치료를 받을 여유가 없어 ‘파스’ 공급이 끊어지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근본 원인은 보건당국의 안일한 대처에 있다. 결핵전문 의료기관인 서울 서대문병원이 ‘파스의 공급이 중단돼 적절한 치료가 어렵다’는 내용의 공문을 국립보건원에 보낸 것이 지난달 17일이다. 서울대병원도 이달 초 식품의약품안전청에 ‘파스 공급에 지장이 없도록 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보건당국은 ‘그동안 제약회사들과 접촉해봤으나 채산성이 맞지 않아 파스를 생산하려는 곳이 없다’고 했지만 이는 무책임한 변명일 뿐이다. 꼭 필요한 약이라고 판단되면 약값을 다소 올려주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생산하도록 하는 게 국민건강을 책임진 보건당국의 바른 자세다.

문제가 불거지자 보건복지부는 뒤늦게 “파스를 생산할 업체를 찾겠다”고 했지만 가격 문제가 타결돼도 원료를 수입해 약이 나오기까지는 앞으로 한 달 이상 더 걸린다고 하니 보건당국의 늑장행정에 결핵환자의 고통만 커지게 됐다. ‘파스’의 생산은 빨리 재개되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당장 약을 수입해서라도 환자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이번 일은 특히 중증결핵환자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의 건강이 걸린 문제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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