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칼럼]신재철/명분을 벗고 시장논리를 입자

  • 입력 2001년 11월 23일 18시 30분


드디어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불과 1∼2년전만 해도 한국을 경제성장의 모델로 삼는다던 중국이 이젠 한국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우리가 중국을 배우자고 야단법석이다.

‘흑묘백묘(黑猫白猫)’를 내세우며 시장을 개방한지 불과 20여년 만에 중국이 신흥경제대국으로 급성장한 저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필자는 중국이 시장논리를 제대로 깨닫고 적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장논리란 무엇인가. 모든 일의 최우선 순위를 시장에 두는 것이다. 시장은 고객의 요구와 선택이 있는 곳이다. 때문에 시장논리란 고객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면서 스스로를 쇄신하게 하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한때 위기를 맞았던 IBM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모든 기업행위를 시장에 둔다’는 원칙을 첫 번째 사내(社內) 지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을 시장논리에 의해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매사에 이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결과 IBM은 오늘날 가장 경쟁력있는 고객 중심의 서비스 회사로 변신할 수 있었다.

과연 한국은 시장논리에 충실한가. 아직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명분을 더 중요시한다. 여기서의 명분은 ‘도덕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라는 의미보다는 ‘표면상의 이유나 구실’을 뜻한다. 농민과 시장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에서 시작된 추곡수매제도가 쌀시장 개방이 불가피해진 지금 농민에게 오히려 더 큰짐을 지우고 있지 않은가.

또한 우리에게는 잘못된 명분에서 비롯된 비생산적인 관행과 허례허식이 많다. 버젓한 직함이 있어야 사람대접을 받는다는 명분 때문에 수없이 복잡다단한 직함과 호칭이 난무하는 사회가 되었다.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늘어난 사교육비는 국가경제를 위협하는 지경이 됐다. 차가 곧 신분이라는 명분이 기름값 비싼 나라에서 소형차를 외면당하게 만들었고 관계가 중요하다는 명분은 가정의 경조비와 기업의 접대비를 늘리고 있다.

이처럼 명분은 논리적이지 못하고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작용될 때가 많다. 공개적으로 명문화되지 않고 사람들의 심리 속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나 일의 결과를 결정적으로 그르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때문에 중요한 프로젝트일수록 명분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외국인 전문가에게 맡기는 사례까지 생긴다.

우리는 종종 한국사람이 개인적으로는 강하지만 조직으로는 약하다는 말을 듣는다. 또한 선진국을 능가하는 정보 인프라와 뛰어난 디지털 능력을 갖춘 네티즌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업 생산성과 사회 경쟁력은 높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가 시장논리보다 명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대처하려면 시장에서 통하는 논리를 갖추어야 한다.글로벌 시장, 디지털 시장에서 명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명분을 벗고 시장논리를 입자. 투명한 프로세스와 깨끗한 업무관행이 우선될 때 시장논리가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신 재 철(한국IBM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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