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문홍/‘촛불 회담’

  • 입력 2001년 11월 9일 18시 42분


작년에 평양을 방문했던 한 기업인의 회고담. 그는 저녁시간에 평양시 외곽 모처에서 북측 아태평화위원회 사람들과 마주앉았다고 한다. 환담 도중에 갑자기 전깃불이 나가자 북측의 최고위 인사가 말했다. “이놈의 불이 갑자기 왜 이렇디?” 그러자 시중 들던 여성 접대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답하더란다. “이거이 다 미국놈들 때문이디요∼.” 일순 남측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리고, 북측 사람들도 피식 실소하고….

▷북한의 전기 사정이 나쁘다는 건 이젠 뉴스도 아니다. 전력난에 관한 에피소드도 참 많다. 엊그제 금강산에서 날아온 사진 한 장도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제6차 남북 장관급회담차 방북한 우리측 홍순영(洪淳瑛) 통일부장관과 북측 김영성 단장이 촛불을 앞에 놓고 환담을 나누는 장면이다. 양측이 사전에 시뮬레이션(모의회담) 연습까지 해가면서 신경전을 벌이는 남북 회담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촛불이 등장한 것이 참으로 기묘하게 보인다.

▷이번에 장관급회담이 열리고 있는 금강산여관은 올해 1월 말에 제3차 남북 적십자회담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 때에도 남북 대표단은 이 호텔에서 촛불을 켜놓고 저녁식사를 함께 했었다. 게다가 난방장치까지 가동되지 않아 숟가락을 든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고 한다. 북측은 이번에는 실내 전등을 모두 교체하고 침구도 새 것으로 바꾸는 등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하지만, 남측 대표단이 도착하기 직전에 또 정전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북측이 ‘일부러’ 회담장의 전기를 끊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북측이 고집을 부린 끝에 결국 금강산에서 열리게 된 이번 회담에서 또다시 촛불이 등장한 것은 북측의 ‘의도’와 관련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한다. 하기야 촛불 아래서면 어떻고, 전깃불 아래서면 어떤가. 이번 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단 교환 등 남북간에 산적한 현안들이 술술 풀리기만 한다면. 촛불로 시작한 회담이 마지막에는 전깃불처럼 환하게 밝아질 수도 있지 않은가.

<송문홍논설위원>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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