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원재/허리띠 푼 정부

  • 입력 2001년 11월 7일 20시 22분


‘한국의 간판기업’인 삼성전자 직원들의 요즘 표정은 밝지 않다. 주력인 반도체 부문이 적자로 돌아섰고 내년이 돼도 좋아지리라는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연말 인사철이 다가오면서 분위기는 더욱 썰렁해지고 있다. 상당수 임원들이 옷을 벗을 것이라는 추측성 소문이 퍼지면서 고참 부장들 가운데 승진의 꿈을 접는 이도 늘었다.

불과 1년전 사상 최대의 흑자에 들떠 ‘승진 잔치’를 벌였던 것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룹 구조조정본부가 내년 인건비를 올해 수준에서 동결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내자 일선 부서는 각종 경비를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짜느라 비상이 걸렸다.

고참 부장 A씨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가 4년 만에 다시 찾아온 느낌이다. 아내에게도 내년엔 각오를 단단히 해두라고 말했다”며 한숨지었다.

가정과 기업은 이처럼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지만 정부의 씀씀이는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내년 예산 규모가 올해 본예산보다 12% 늘어 ‘팽창예산’이라는 지적까지 받는다. 정부는 내년 예산이 늘어난 주 요인은 재정 집행을 늘려 경기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공무원 총 인건비를 9.9% 늘리고 1인당 평균 급여를 6.7% 올리기로 한 대목에서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박봉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의 처지를 감안하면 마냥 비판만 할 수도 없겠지만 내핍을 각오해야 하는 민간 부문의 상대적 박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언오 박사는 “적자가 쌓이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 기업과 손해를 봐도 누군가(국민)가 메워주는 정부의 태생적 차이가 위기 의식면에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힘든 여건에서도 미래경쟁력의 핵심인 연구개발(R&D) 투자비를 한푼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비용 지출을 최대한 줄인다. 혹시라도 정부가 국민의 세금을 ‘내 돈’이 아니라 흥청망청 써도 되는 ‘남의 돈’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박원재 <경제부>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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